한국전쟁 당시 임진강 리비교 초소 분대장이었던 98세 손진규 옹이 파주시의 임진강 리비교 철거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냈다. 손 옹은 한국전쟁에 참전해 리비교가 건설되기 전 그 자리에 놓였던 부교와 곤돌라의 안전을 적으로부터 지켜내는 임무를 맡았다. 리비교는 한국전쟁 시기인 1953년 준공됐다. 콘크리트 다리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군사용 부교와 목재다리, 곤돌라 등을 통해 병력과 군수물자를 날랐다. 임시 교량은 장마철이 되면 모두 떠내려갔다. 개성이 고향인 손진규 옹의 처갓집은 임진강 건너 진동면 하포리다. 한국전쟁과 함께 피란길에 오른 처갓집 식구들은 리비교가 놓이기 전 나룻배를 타고 임진강을 건넜다. 그리고 파평 장파리에 정착했다. 손 옹은 오랜 세월 민간인통제선이 된 처갓집 근처 논밭을 지금도 일구고 있다. “리비교를 고친다고 출입을 못 하게 해 10분이면 가는 길을 저 아래 전진교로 돌아가는 바람에 30분이나 더 걸리고 있어. 그래서 다리를 빨리 고쳤으면 좋겠는데, 요새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리비교를 모두 걷어내고 새롭게 놓아야 한다는 거야.” 손진규 옹은 리비교가 모두 철거된다는 소식에 흥분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 다리가 참 알고 보면 역사가 많은
파주 시민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군부대가 주민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육군 제2기갑여단(여단장 손석민)은 12월 27일 군 장병 가족과 주민 7천여 명을 ‘제1회 청년드림·국군드림 페스티벌’에 초대했다. 2기갑여단 공보정훈참모 이종민 소령은 “오늘의 첨단과학기술군과 청년드림, 국군드림 페스티벌은 변화하는 안보 환경과 제4차 산업시대를 맞아 이를 반영하기 위해 개최하게 됐다. 내년에도 장단콩축제와 같이 파주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는 행사를 전반기와 후반기 각각 두 차례 추진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한국전쟁 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피엑스마을(군 마켓)’로 불리기 시작해 현재도 버스정류장 명칭이 ‘PX마을’인 이곳 2기갑여단에는 미7사단 소속 ‘캠프 로즈(Camp Ross)’가 있었다. 이 부대에는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큰 물류창고가 있어 생계 해결을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PX마을’로 불렸다. ‘캠프 로즈’는 1971년 닉슨 독트린 정책에 따라 한국 주둔 미군 2만여 명이 감축되면서 미국으로 철수했다. 이후 1968년 4월 경기도 양주에서 창설한 기갑부대가 1973년 6월 27일 ‘육군 제2기갑여단’으로 파주시 아동동 ‘PX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대전지역 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조합원 70명이 21일 반환 미군부대 캠프하우즈 안에 조성된 ‘엄마 품 동산’을 찾았다. 참가자들은 현장사진연구소 이용남 사진가의 엄마 품 동산 조성 취지를 듣고 분단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너무 몰랐다고 했다. 엄마 품 동산은 파주시가 해외입양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지난해 9월 준공했다. 이들은 이날 1960년대 번성했던 파주읍 용주골 옛 미군 기지촌의 골목도 답사했다.
파주시가 반환 미군기지인 캠프하우즈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평화공간으로 조성한다. 언론협동조합 파주바른신문은 오랜 기간 파주 미군 기지촌을 기록해 온 현장사진연구소와 공동으로 캠프하우즈를 둘러싼 지역사회를 들여다본다. 2001년 7월 16일 미군 제2사단 공병여단 캠프하우즈 후문. 건설노동자 전동록(당시 53) 씨가 미군이 설치한 고압선에 감전됐다. 전동록 씨는 사고 뒤 팔 다리를 모두 잘라야 했고, 사실상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이 살아오다 2002년 6월 6일 오후 12시 25분께 일산병원에서 배에 물이 차고 혈관이 터지면서 모진 삶을 마감했다. 부인 이명화(48) 씨는 영안실 유리창을 부여잡고 절규했다. 당시 전동록 씨가 감전된 문제의 고압선은 캠프하우즈 울타리에서 약 500m 떨어진 파주시 조리읍 뇌조리 조산말 개울 옆에 있는 양수장 펌프를 가동하기 위해 설치했던 것으로, 평소 조봉환 이장 등 마을 주민들이 안전사고 위험을 계속 지적하며 다른 곳으로의 이설을 요구했으나 미군쪽은 법적 하자가 없다며 안전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뇌조리 조산말 양수장에서 미군부대로 연결된 2만2900볼트의 고압선은 전동록 씨가 일하던 건설 현장 지붕으로부터 불과 2~
의정부지방법원 제1행정부(부장판사 변민선)는 3일 파주시가 지난해 9월 조리읍 봉일천리 캠프하우즈 주변 도시개발사업 시행자인 ㈜티앤티공작(티앤티)에 대해 ‘사업시행자 지정 취소처분’을 하자 티앤티가 낸 ‘행정심판 및 행정소송 효력 집행정지’ 신청을 모두 기각했다. 파주시는 2009년 공모를 통해 ‘티앤티’를 사업자로 선정해 반한 미군부대인 캠프하우즈의 공원 조성은 파주시가 맡고, 도시개발사업은 ‘티앤티’가 추진한다는 협약을 체결해 2014년 도시개발사업 구역지정 및 개발계획에 대한 사업 시행을 승인했다. 그러나 ‘티앤티’는 금융사 및 건설사 책임준공 확약서를 미제출하고 토지 보상 및 주민이주대책 계획을 세우지 않는 등 지난해 말까지 부담해야 할 재정 분담금 150억 원을 부담하지 않는 데다 실효성 없는 양해각서만 제출했다. 파주시는 2016년 3월부터 실시계획인가를 위해 ‘티앤티’ 측에 승인 조건과 협약, 인가요건 이행 및 요건 충족 등을 요구했으나 신뢰할 만한 이행 계획을 제출하지 않아 민간사업자 지정을 취소했다. 캠프하우즈 주변지역 도시개발사업은 조리읍 봉일천리 110-11번지 일원의 47만6천㎡(약 14만평)에 공동주택 등을 조성하는 사업으로 2014년
파주시가 반환 미군기지인 캠프하우즈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평화공간으로 조성한다. 언론협동조합 파주바른신문은 오랜 기간 파주 미군 기지촌을 기록해 온 현장사진연구소와 공동으로 캠프하우즈를 둘러싼 지역사회를 들여다본다. 그 첫 번째로 1968년 가을 조리읍 봉일천4리에서 흑인 미군병사에 의해 살해된 열아홉 살 미군위안부 사건을 당시 이를 목격한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다. “한 50년 됐나?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저 위, 공릉 가는 길 그쪽 이층집에서 흑인 미군병사가 열아홉 살이나 됐을까 싶은 그 양색시를 목에 끈을 매 창문 밖으로 끌어내 죽인 거야. 그때 봉일천 삼화병원 의사가 저 소나무 아래에서 해부(사체 검안)를 했었지.” 조리읍 봉일천4리 이재춘(96) 할아버지의 기억이다. 할아버지가 기억하고 있는 살해 현장은 2층집이었다. 1층은 미군 홀이었고 2층은 기지촌 여성들의 숙소인 이른바 ‘벌집’이었다. 흑인병사는 술을 마신 후 2층에서 한국 여성과 잠을 잤다. 그리고 이른 아침, 벌집 창문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이어 넓적한 허리띠처럼 생긴 끈에 목을 매단 여성이 창문 밖으로 내던져졌다. 흑인병사는 발버둥치는 여성의 목줄을 당겼다
“25년 전 장준하 선생 시비가 우리 마을로 들어오는 것에 사실상 찬성하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시골에 살고 있어도 장준하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가져온 걸 뭐 얘기할 필요가 있겠나 싶어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 산골짜기에 있는 것보다는 파주 분들의 말씀대로 후학을 위해 장준하 선생님 묘역으로 옮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강원도 동해시 이기리 마을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살고 있는 오화선(71) 전 이장이 마을을 찾은 ‘장준하시비이전위원회’ 회원들에게 한 말이다. 지난 11월 18일 ‘장준하시비이전위원회(위원장 이경형)’ 회원 10여 명은 30년 전 파주 장곡리 검문소 옆에서 동해시 이기리로 옮겨진 장준하 선생 시비와 새긴돌을 찾아나섰다. 이 마을 오화선 전 이장은 자신이 이장을 맡았던 때인 1994년께 시비와 새긴돌이 마을로 들어왔다고 기억한다. 해병대원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오화선 전 이장은 당시 트럭에 실려 온 시비와 새긴돌에 장준하 선생의 이력이 있었는데, 선생이 어떤 인물인지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즉, 장준하 선생을 독립운동가보다는 국가 안보와 배치되는 인물로
파주시가 파평면 덕천리 아프리카돼지열병 살처분 매몰지에서 침출수가 유출되고 있다는 JTBC 보도와 관련 이를 전면 반박하는 보도자료를 내는 한편 15일 JTBC 취재진과 현장 조사를 벌였다. 이날 농림축산식품부는 침출수와 토양을 채취해 검역 당국에 성분 분석을 의뢰했다. JTBC는 14일 “연천 말고 없다더니... 파주 살처분 매몰지에서도 침출수”라는 내용으로 보도했다. 파주시는 즉각 보도자료를 통해 “보도된 장소는 살처분 돼지사체 매몰지가 아니라 돼지사체를 랜더링 방식으로 분쇄해 180도의 고온으로 가열한 후 발효를 거친 검은색 왕겨와 톱밥 등을 섞어 퇴비를 만드는 장소이며, 침출수는 돼지사체에서 직접 유출된 혈액이 아니라 퇴비화 과정에서 검은 왕겨가 온도상승에 따라 증기가 응축돼 흘러나온 퇴적물이다.”라고 밝혔다. 15일 침출수 현장에 나온 경기도 가축위생방역지원본부 관계자는 “농촌의 퇴비더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암록색 침출수와 같은 현상이다. 랜더링 후 사용되는 왕겨는 미생물 배양을 위한 발효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왕겨가 검은색이다. 이 검은색 왕겨에서 돼지사체 혈액처럼 보이는 암록색 물이 나온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농림축산식품부 방역정책과 이중혁
임진강 리비교가 숱한 사연을 뒤로 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있다는 파주바른신문 보도와 관련, 파주시장 권한대행을 맡았던 김준태 경기도 도시주택실장이 아쉬움을 나타내는 등 많은 사람들이 리비교의 역사적 의미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경기도 김준태 실장은 “리비교를 리모델링해 토목교량의 교육적 자산과 관광자원으로의 활용 계획이 리비교 철거와 재가설로 사실상 무산된 것 같아 많이 아쉽다.”라며 안타까운 심정을 문자로 보내왔다. 2017년 1월 파주부시장으로 부임한 김준태 실장은 이재홍 시장의 구속으로 파주시장 권한대행직을 수행하는 등 2018년 7월까지 재직하다가 현재는 경기도 도시주택실장을 맡고 있다. 김 실장은 권한대행 시절인 2017년 5월 남경필 경기도지사를 비롯 더불어민주당 박정 국회의원, 최종환, 한길룡 경기도의원 등과 함께 리비교 현장을 방문해 리비교의 역사를 활용한 토목교육장과 관광자원화 계획에 기대를 보이기도 했다. 지방행정동우회 파주시지부 송영길 지부장은 “한국전쟁 등 특별한 역사를 안고 있는 리비교가 애초 계획과는 달리 전면 재가설되는 것이 안타깝다. 진작에 리비교를 문화재로 관리했어야 했는데 너무 아쉽다.”라고 했다. 파주시청 문화공보실
장준하시비이전위원회(위원장 이경형)가 창립 첫 번째 사업으로 강원도 동해시 산속에 있는 장준하 선생 새긴돌과 시비를 답사한다. 김대년 집행위원장은 “창립식과 함께 병석에 계신 백기완 선생을 찾아뵐 예정이었으나 선생께서 아직 대화를 할 정도로 병세가 회복되지 않아 먼저 동해시에 있는 시비와 새긴돌을 답사한 후 백 선생님의 병문안을 추진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동해시에 있는 장준하 선생 시비 답사를 위해 오는 18일 오전 8시 금촌에 있는 파주스타디움(종합운동장)에서 출발할 예정이다. 위원회는 이날 장준하 선생 시비가 있는 이기리 마을 주민들도 만날 예정이다. 장준하 선생 시비는 1985년 야당지도자였던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 민주화 동지들이 십시일반으로 제작해 1989년 파주시 장곡리 검문소 부근에 새긴돌과 함께 세워졌으나 괴한들이 시비에 불을 지르는 등의 탄압으로 강원도 동해시로 옮겨졌다. 이에 따라 뜻 있는 파주 시민들이 모여 지난 7일 장준하시비이전위원회 창립식을 갖고 시비와 새긴돌을 현재 장준하 선생이 모셔진 탄현면 ‘장준하 공원’으로 이전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리비교를 건널 때는 먹고 살아야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는데 밤 10시까지 미군과 놀고 다시 리비교로 나오면 휴... 하고 숨을 내쉬며 살았구나 했지. 임진강 건너에는 미군부대 가 천지였는데, 재수가 좋은 날이면 미군한테 10불, 20불도 받고, 재수 없으면 콜라 한 병도 못 얻어먹고 나온 날이 많아... ” ‘베기 박’(71)이 문산 선유리 미군 기지촌에 온 것은 17살 때인 1966년이었다. ‘베기 박’은 미군이 떠난 지금까지 선유리에 살고 있다. ‘베기 박’은 리비교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다. 어린 여성을 찾는 미군클럽 매니저 눈에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들어가기 어렵다는 임진강 건너 미군부대에 불려갔다. 미군 전용 아리랑 택시를 타고 임진강 리비교 검문소를 지날 때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버텼다고 한다. 그리고 밤 10시가 되면 구불구불 캄캄한 흙먼지 길을 따라 ‘리비교’를 다시 건너는데, 그때 임진강을 비추고 있는 군사용 조명이 그렇게 아름다웠다고 한다. ‘베기 박’은 그렇게 5년간 리비교를 건넜다. 한국전쟁 정전협정 이후 임진강 건너에는 미군부대가 밀집했다. 초평도
“파주 장곡리 검문소에 세웠던 장준하 선생 시비는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에 장준하 선생님과 함께 투쟁 대열에 섰던 당시 야당의 지도자 김영삼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해 평생을 통일운동에 몸바치고 계시는 백기완 선생 등 민주화 투쟁 동지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경형 위원장의 창립 기념사 중 한 대목이다. ‘장준하시비이전위원회’ 창립식이 7일 탄현 낙하리 ‘다온숲 카페’에서 열렸다. 이날 창립식에는 ‘장준하기념사업회’ 장호권 회장과 김도현 전 문체부 차관, 중앙선관위 김대년 전 사무총장 등 50여 명이 모였다. ‘장준하시비이전위원회’ 고문인 김도현 전 차관은 “파주가 정말 좋은 분인 장준하 선생을 파주에 모셨다. 그럼에도 그동안 우리가 잘못한 것이 있다. 파주 장곡리 검문소 부근에 세워졌던 장준하 선생 시비를 지키지 못 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한 것은 대단히 죄송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경형 위원장은 기념사에서 “장준하 시비를 선생의 혼백을 모신 통일동산의 장준하 공원에 제대로 정립시키는 일은 장 선생에 대한 숭모의 정을 새롭게 다지고 우리의 결의를 다지는 일이다. 이것은 단순한 시비가 아니라 엄혹한 한 시대의 끈질기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