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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저 다리가 아무 써먹을 데 없는 고물이라도...”


현장사진연구소 이용남 사진가의 리비교 가는 길사진집이 출간된다. 이 사진집은 한국전쟁에 참가한 미군이 전쟁물자 수송을 위해 195374일 임진강에 건설한 리비교를 파주시가 새로운 다리 건설을 위해 철거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리비교 주변 마을에서 1955년 출생한 사진가는 너댓 살 때 임진강 건너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아버지를 따라 리비교를 건넌 기억과 미군병사였던 아버지를 찾으러 미국으로 떠나는 흑인 혼혈 친구와 리비교 아래에서 밤을 지새운 기억을 작업노트에 떠올렸다.

 

 이 사진집에는 동화작가로 유명한 장경선 작가의 글이 실렸으며, 여현미 선생이 디자인을 맡아 파주 교하에 있는 구름바다출판사(대표 박인애)에서 출간된다.

 

 아래는 사진집에 실린 이용남 사진가의 서문이다.

 

작가의 글

한국전쟁 당시 남쪽 임진강에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교량 11개가 세워졌다. 정전협정 이후 크고 작은 다리는 모두 없어지고 파평면 장파리의 리비교만 남았다. 195374일 주한미군이 건설한 리비교는 피란민, 농민, 군인, 미군클럽 종사자 등 수많은 사람들이 건너다녔다.

 

나의 고향은 파평면 아랫장마루. 우리 집 사랑방에는 내 또래의 흑인 혼혈 아이와 양공주라고 불렸던 엄마가 미군과 함께 세 들어 살았다. 미군 아버지는 리비교 건너 부대에 근무했는데 주말이 되면 집으로 오곤 했다.

 

내 흑인 친구는 미군 아버지가 오면 밖으로 쫓겨나다시피 했다. 해 떨어져 어둠이 깔려도 들어오라는 소리가 없을 때는 우리 집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내 친구가 살던 그 사랑방은 가끔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비명에 가까운 울부짖음이 더 많았다.

 

저녁 무렵이면 리비교 검문소 앞이 북적였다. 미제물건 장사꾼과 클럽 포주와 양색시(미군 위안부), 그리고 달러상 등 하루 일과를 마치고 리비교를 건너오는 미군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나는 흑인 친구와 곧잘 리비교에 갔다. 운이 좋으면 미군이 던져주는 초콜릿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날은 내 친구 엄마를 만나기도 했다. 친구는 엄마를 보면 내 뒤로 숨었다. 그러다가 엄마 눈에 띄게 되면 엄마는 빨리 집에 가라며 돌멩이를 던지는 시늉을 했다.

 

언제부터인가 친구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내 나이 아홉 살 때인 1964년이었다. 혼혈 친구는 나보다 한 살 많았다. 사랑방에서는 거의 매일 술에 취한 엄마의 욕설과 친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엄마가 손목을 그었다. 사랑방 솜이불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문산 병원으로 옮겨진 친구 엄마는 그 병원에서 아들 몰래 어디론가 떠났다. 나는 친구와 함께 우리 집에서 지냈다. 내 친구는 거의 매일 리비교 앞에서 미군 아버지를 기다렸다.

 

1965년 어느 날 친구는 나에게 아버지를 만나러 미국에 간다고 말했다. 내일이면 아버지를 아는 어떤 아줌마가 데리러 온다고 했다. 그날 밤 나는 친구와 함께 리비교 밑에서 밤을 지새우며 여름철 홍수 수위를 눈금으로 표시해 놓은 교각의 숫자에 돌팔매질을 했다.

 

우리는 실뱀장어를 잡는 임진강 불빛이 사라질 때까지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했다. 미국에 가면 꼭 편지를 하겠다고...

 

친구는 미군 아버지를 만났을까?

새끼손가락 걸었던 리비교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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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파리 이야기에 유명인과 술집이 그렇게 중요한가? 1960년대 파평면 장파리 현대사를 얘기하다 보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가수 조용필이다. 조용필이 고등학교 때 장파리로 가출해 미군 클럽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했다는 것이다. 그 클럽은 파주시가 발간한 ‘장파리 마을이야기’에 나오는 ‘라스트 찬스’이다. ‘라스트 찬스’ 이름의 진실은 지난 호에서 언급했으므로 생략한다. 파주바른신문은 2021년 5월 한겨레신문과 함께 조용필 씨가 파평면 장파리 미군 클럽에서 노래한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조용필 씨 매니저를 접촉했다. 그런데 매니저는 공식적으로 얘기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한겨레도 흑역사로 치부될 수 있는 과거를 뚜렷한 사실관계 없이 지역이나 특정 목적 홍보에 이용하는 건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런 얘기는 조용필 씨와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이 술자리 정도에서나 나눌 얘기라고 덧붙였다. 파주시가 발간한 ‘장파리 마을이야기’는 가수 조용필 씨가 ‘라스트 찬스’에서 노래를 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마을이야기에 왜 술집과 유명인들을 앞세우는지 알 수 없다. 조용필 씨가 장파리에서 노래를 했든 안 했든 그것이 왜 마을이야기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 걸까? 한국전쟁 이후 미군의 본격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