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지촌 하면 딱 떠오르는 게 무엇일까요?” 현장사진연구소 이용남 사진가가 기지촌 올레에 나선 40여 명의 참가자에게 물었다. 참가자 대부분이 ‘성매매’라고 답했다. 사진가는 틀렸다고 했다. 기지촌 성매매는 일부에 불과한 것이며 기지촌에는 성매매 집창촌이 없었다고 했다. 참가자들은 어리둥절했다. 파주시민참여연대, 고양파주여성민우회, 파주시(가람도서관) 주관으로 5월 12일 파주 기지촌 역사탐방이 진행됐다. 자녀의 손을 잡은 참가자들은 1960년대 대한민국 최대 기지촌이었던 파주읍 용주골과 파평면 장파리를 둘러봤다. 비가 온종일 내린 12일 교하 해솔마을 관리사무소 회의실에서 이용남 사진가의 기지촌 강의를 듣고 파주읍 용주골 연풍초교 후문에 도착했다. 참가자들은 옛 미군 클럽 골목을 탐방했다. 도로를 경계로 흑인과 백인 지역이 나뉘었다. 흑인이 이용했던 미군 클럽은 마치 창고 같았다. 그러나 길 건너 백인 출입지역은 3층 건물이 곳곳에 서 있는 등 확연히 다른 모습이어서 인종차별을 느낄 수 있었다. 60년대 용주골은 흑인 출입지역과 백인 출입지역, 그리고 개울 건너 집창촌이 형성됐다. 집창촌은 한국인을 상대했다. 이른바 ‘달러골목’으로 불리는 곳에는 문
“그때가 1969년 3월이었어요. 한 선생님이 1학년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아무 말도 없이 칠판에 손바닥을 그리더니 손 가운데에 ‘근’이라고 써 넣고는 ‘이게 내 이름입니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우린 그냥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오손근?’ ‘손오근?’만 외치다가 결국 ‘손근’이라는 걸 못 맞췄어요.” 금촌재건중학교 졸업생의 입학식 기억이다. 수학을 가르쳤던 손근 선생님은 파주시청 과장 퇴직을 한 후 현재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살고 있다. 금촌재건중학교는 1966년 ‘파주군립도서관’이 ‘금촌복지관’(극장) 부속 건물로 이전하면서 그 자리에 학생 90명과 교직원 6명으로 설립됐다. ‘파주군립도서관’은 교하 문발리 출신 이달형(90) 교하면장이 1958년 ‘농촌교육사회사업복지학원’을 세워 운영할 당시 서울시로부터 기증받은 책을 중앙통신교재로 독학을 하는 청소년들의 주말 학습을 돕기 위해 독서실로 시작했다가 1963년 70평(103석) 건물에 국한서와 양서 등 2,800여 권의 규모로 ‘파주군립도서관’을 정식 등록했다. 금촌농협 안광헌(74) 전 조합장은 “금촌 달동네 침례교회 위쪽 공터에 천막교실이 있었는데 주말이면 거기에 가서 책을 빌려 보거나 모르는 문제를
군부대 담벼락에 여성의 반라를 표현한 벽화가 적절하지 않다는 언론협동조합 파주바른신문의 보도 이후 해당 군부대가 이를 하얀 페인트로 덧칠해 지웠다. 위 첫 번째 사진은 여성을 상품화한 듯한 벽화이고, 아래 사진은 이를 지운 모습이다. 아래의 글은 지난 11일 보도한 내용이다. 한국전쟁과 함께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옛 기지촌이 벽화마을로 변신하고 있다. 칙칙했던 골목과 딱딱하기만 했던 군부대 담벼락이 친근한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다. 벽화 소재를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다. 그림물감도 가능하면 친환경 페인트로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물론 예산의 문제도 있어 당장 반영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벽화 내용만큼은 미리 심의 결정했으면 좋겠다. 사진은 법원읍 웅담리 군부대 담벼락의 그림이다. 여성을 과녁에 놓고 화살로 맞춘 모습이다. 언뜻 보면 미국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여성의 성을 상품화한 듯하기도 하다. 법원읍은 벽화 비용 750만 원을 지원했다. 우리는 ‘기지촌’ 하면 ‘미군 위안부’를 떠올린다. 성매매가 일상이었던 그곳에서 혼혈인 4만여 명이 전 세계에 입양됐다
파주시가 남북정상회담을 약 열흘 앞둔 16일 임진강을 사이로 남북이 마주하고 있는 탄현면 대동리 등의 주민을 상대로 ‘적 포격도발 대피훈련’을 실시했다. 오후 2시 탄현면 대동리. 팔에 노란 완장을 찬 파주시 공무원이 대동리 경로당에서 할머니 8명을 대피소로 안내했다. 그리고 5분 만에 대피훈련이 끝난 할머니들은 다시 경로당으로 돌아갔다. 이날 대피훈련은 대동리 354명, 금산리 218명, 오금2리 239명 등 총 811명의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 됐으나 35명만이 참여했다. 대피소 수용인원은 대동리 153명, 금산리 92명, 오금2리 92명 등 총 337명이다.
1950년대 천현면(법원읍)은 곳곳이 미군부대였다. 천현면 법원리 사거리를 중심으로 의무대대 ‘캠프 어윈’이 있었고, 문화창조밸리로 바뀐 집창촌 앞에는 ‘캠프 케녹’, 농협 뒤쪽으로는 ‘캠프 스노우’가 주둔했었다. 그리고 법원초교 쪽에는 ‘캠프 워너’가, 가야리에는 ‘캠프 맥 네일’이 있었으며, 금곡리와 웅담리에도 미군 제7사단과 24사단 사령부가 자리 잡으면서 율곡 선생과 어머니 신사임당의 묘가 모셔져 있는 천현면 전 지역이 미군 기지촌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천현면은 파주시 최초의 ‘파주군 성병관리소’가 초리골 입구에 있어야 할 만큼 미군과 위안부가 많았다. 1968년 천현면의 인구는 30,229명으로 농사를 짓는 농가는 1,188가구였고, 비농가는 4,008가구로 미군을 상대로 한 서비스산업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미군부대가 없었던 교하면의 경우 1968년 인구가 15,671명에 농가 2,140가구, 비농가 425가구였던 것과 비교해 볼 때 기지촌의 상업 규모와 인구의 집중을 알 수 있다. 법원읍의 현재 인구는 12,453명이다. 그런데 여기 천현면에 파주에서 처음으로 재건중학교가 설립되었다. 즉, 1961년 덕성재건중학교가 천현면 대능리 장군
한국전쟁과 함께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옛 기지촌이 벽화마을로 변신하고 있다. 칙칙했던 골목과 딱딱하기만 했던 군부대 담벼락이 친근한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다. 벽화 소재를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다. 그림물감도 가능하면 친환경 페인트로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물론 예산의 문제도 있어 당장 반영하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벽화 내용만큼은 미리 심의 결정했으면 좋겠다. 사진은 법원읍 웅담리 군부대 담벼락의 그림이다. 여성을 과녁에 놓고 화살로 맞춘 모습이다. 언뜻 보면 미국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여성의 성을 상품화한 듯하기도 하다. 법원읍은 벽화 비용 750만 원을 지원했다. 우리는 ‘기지촌’ 하면 ‘미군 위안부’를 떠올린다. 성매매가 일상이었던 그곳에서 혼혈인 4만여 명이 전 세계에 입양됐다. 이제 그 군사문화를 청산하고 우리의 희망이 담긴 그림으로 수놓아지길 기대한다.
고만고만한 세 여중생이 바람 산들 부는 봄이면 진달래꽃을 손바닥으로 훑이며 봉서산 고개를 넘었다. 이렇게 한 시간 남짓 고빗길 따라 걷다 보면 도토리나무 사이로 ‘애향재건중학교’가 희미하게 보였다. “재건중학교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딸이 애향중학교에 다녔어요. 그때 생활이 어려워 저 봉서산 너머 학교에 보냈죠. 거리도 멀고 또래들의 놀림도 좀 있었던 학교여서 부모 입장에서는 사실 마음이 편하지 않았죠. 그런데도 애들은 신났던 것 같아요. 봄이면 진달래를 한 다발씩 꺾어 빈 도시락 달깍거리며 뛰어오곤 했으니까요.” 언론협동조합 파주바른신문 ‘바른체크팀’이 옛 애향재건중학교를 찾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오랜 수소문 끝에 졸업생과 학부모를 만날 수 있었지만 재건학교 출신임을 감추고 싶어하는 것이 역력했다. ‘애향재건중학교’는 주내면(파주읍) 봉서2리 봉서산 기슭에 있었다. 주내면 파주리와 연풍리는 봉서산 동쪽에, 봉서리는 서쪽에 있다. 애향재건중학교에 다니는 동쪽 마을 학생들의 등굣길은 파주초등학교 옆길을 따라 파주향교와 약수터를 지나고, 봉서산 중턱 ‘아미재’ 고개를 넘는 것이었다. 애향재건중학교의 설립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졸업생과 학부모의 말을
1957년 파주 주내면(파주읍) 파주리에서 태어난 이영순(미국 이름 Dianna Hould) 씨가 법원읍 법원리의 옛 마을 사진을 공개했다. 이영순 씨는 1958년 7월 미국 몬타나 주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젊은 부부에게 입양됐다. 당시 이 씨의 입양서류에는 ‘이순자’라는 이름과 서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순자 씨가 친생모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영순 씨는 지난해 봄 입양서류에 있는 주소지 마을을 찾아 어머니의 생사를 확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영순 씨가 공개한 사진은 1958년 천현면 법원리 미군 제1기갑 15의료대대에 복무했던 이 씨의 양부모 삼촌이 촬영한 것이다. 현장사진연구소가 이 사진을 현장 확인한 결과 법원2리 온양동 방향으로 판단된다.
“조용필이 고등학교 때 장파리 ‘DMZ클럽’에서 수습밴드로 있었어요. 그러다가 잠시 ‘블루문홀’을 왔다 갔다 했지만 주로 ‘DMZ클럽’에 있었죠. ‘라스트찬스클럽’에는 없었어요. 거기는 가수 정훈희 남편 김태화밴드가 있었습니다.” 1960년대 장파리와 용주골 등 기지촌을 무대로 주먹 생활을 했던 김 아무개(73) 씨의 증언이다. 음악에도 소질이 있던 김 씨는 60년대 장파리 미군클럽을 제집 드나들듯 했다. “당시 장파리는 파평면이 아니라 적성면이었어요. 임진강 건너에 미군부대가 있어서 일과를 마친 미군들이 저녁이면 몰려나왔죠. 미군클럽이 ‘DMZ클럽’, ‘블루문홀’, ‘메트로홀’, ‘럭키바’, ‘라스트찬스’, ‘나이트클럽’ 등 6곳이 있었어요. 클럽마다 모두 전속 밴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죠. 내 기억에는 DMZ클럽에 앳킨스밴드, 블루문홀에 혹부리밴드, 라스트찬스에는 4인조로 구성된 김태화밴드가 있었습니다. 김태화밴드는 나중에 밴드 이름을 ‘라스트찬스’로 바꿨습니다.” “조용필은 18살 때인가 DMZ클럽에 잠깐 왔다가 며칠 못 있고 갔어요. 깜보음악(흑인 락)을 배우러 왔던 것 같아요. 아마도 그때 조용필이 장파리를 떠나 용주골 세븐클럽에서 기타 연주를 하다
건설현장 업자에게 수차례에 걸쳐 돈을 받은 혐의로 1심과 항소심에서 유죄를 받고 상고한 지역신문 김 아무개 발행인과 내 아무개 발행인에 대해 대법원이 16일 상고를 기각했다. 파주지역에서 신문사를 각각 운영하고 있는 두 발행인은 2013년 5월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1심 재판에 넘겨져 항소심과 대법원까지 약 4년여 재판을 받아왔다. 대법원의 최종 판결로 김 아무개 발행인은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내 아무개 발행인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됐다. 두 발행인은 정기간행물의 등록에 관한 법률에 따라 신문발행인을 맡을 수 없게 됐다.
파주바른신문이 집중보도하고 있는 헤이리예술마을 등 농어촌민박 운영 실태에 대해 파주시가 특정감사를 실시한다. 3월 말까지 실시되는 이번 감사에서는 농어촌정비법, 건축법, 공중위생법 등 위반 여부와 담당부서의 업무 관리를 살펴볼 예정이다. 현재 파주시에는 농어촌정비법에 따라 신고 등록된 민박사업장은 헤이리예술마을 8곳을 비롯 총 87곳이 있다. 이중 탄현면이 34곳으로 가장 많고 법원읍 22, 파평면 11, 적성면 8, 파주읍 4, 운정동 2, 교하, 조리, 월롱면에 각각 1곳씩이다. 농어촌민박사업은 농어촌지역 또는 준농어촌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이 연면적 230㎡ 미만의 단독주택을 이용해 운영할 수 있으며,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제3조에 따른 수동식 소화기를 구비하고 각 객실마다 ‘단독 경보형 감지기’를 설치하여야 한다. 민박사업은 주민이 직접 거주하는 주택을 농어촌민박으로 이용하기 위해 증개축을 할 경우 총사업비 80% 이내의 농업종합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 다만 지원 대상자는 농업인인 경우에만 가능하다.
파주시의회 이평자 의장이 재판을 받는다. 최영실 전 의원이 위증 혐의로 고소를 했기 때문이다. 파주바른신문은 최 전 의원이 이용남 기자를 만나게 된 과정을 3차례 나누어 연재한다. 첫 번째 글에서는 사실관계만 전달하고 분석이나 판단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의 존칭은 생략하기로 한다. 이용남이 최영실을 처음 알게 된 때는 2014년 6월 지방선거 무렵이다. 당시 이용남이 최영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민주당 비례대표 경선에 나선 최영실이 과거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파주시의원을 지냈었다는 것과 문산에서 유치원을 경영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최영실은 시민단체 활동을 하고 있는 임경란과 비례대표 경선을 통해 파주시의원에 당선됐다. 지방선거가 끝난 6월 18일 민주당 이종욱 노인위원장이 파주신문 내종석 발행인에게 최영실로부터 200만 원을 받았다는 양심선언 취재를 요청했다. 당시 파주신문은 협동조합 설립 준비를 위해 사무실을 금촌의 옛 돌고래수영장으로 이전했다. 이 사무실에서 임경란과 내종석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용남은 이종욱의 양심선언 영상인터뷰를 담당했다. 이용남은 인터뷰 내용이 일방적이어서 6월 20일 오후 6시 22분 최영실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