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시 월롱면 영태리 삼륭물산 물류센터에서 1일 오후 5시 12분께 화재가 발생했다. 소방당국은 대응 2단계를 발령했다. 휴가 중인 최종환 파주시장은 현장에 나와 상황을 보고받고 폭염 속 소방대원을 격려했다. 최 시장은 안전총괄과 이종칠 과장에게 ‘소방관들이 땀범벅으로 탈진될 우려가 있으므로 파주시가 탈진 보충제인 식염포도당 지원을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식염포도당은 포도당과 염화나트륨(소금) 성분으로, 알약과 주사제 두 종류가 있는데 주사제는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하지만 알약은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다. 불은 4천722㎡ 규모의 창고 건물과 안에 있던 가구, 매트리스 등을 전부 태우고 10시간 만인 2일 오전 3시께 4억5000만 원의 재산피해를 내고 진화됐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한복 차림의 어머니가 아이를 품에 안고 있다. 이른바 ‘모자동상’이다. 법원읍 ‘부인의원’ 정원에 세워져 있던 이 동상이 ‘엄마 품 동산’에 기증됐다. ‘엄마 품 동산’은 조리읍 봉일천리 반환 미군부대 캠프하우즈에 조성돼 9월 준공을 앞두고 있다. 파주 사람들에게 산부인과로 더 잘 알려진 ‘부인의원’은 1961년 천현면(현 법원읍) 법원리 447번지에 개원했으나 행정당국에는 1971년 12월 200여 평 규모의 2층 건물과 8개의 입원실이 등록돼 있다. 이는 ‘부인의원’이 처음 10여 평짜리 건물에서 기지촌 여성들의 진료를 보는 것으로 시작해 몇 차례 자리를 옮겼다가 병원 건물을 신축하면서 파주시 보건소에 등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처음 개원했던 부인의원 자리는 현재 빈터만 남아 있다. “손님이 얼마나 많았는지 저기, 저 길까지 늘어섰었어요. 거의 뭐, 미군을 상대하는 양색시들이었죠. 나도 큰딸을 저기서 낳았어요.” 부인의원 옛터 옆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유 아무개 할머니의 회고이다. 부인의원 고 남영원(85) 원장의 아들 김주현 씨는 ‘모자동상’ 건립에 대해 “어머니가 산부인과를 운영하면서 수천여 명의 산모가 하나같이 아이를 품에 안고 젖을 물리는
한국전쟁 이후 파주 지역의 영화관은 문산 등 미군이 주둔하는 북파주지역 기지촌에서 개관했다. 1960년 파주군 인구는 14만8,103명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287명 더 많았다. 그러나 1961년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3,352명이 더 많은 15만860명으로 늘어났고, 1970년에는 19만1,434명으로 증가한 후 그 다음 해인 1971년에는 16만3,531명으로 2만7,903명이 줄었다. 이는 미국의 닉슨 독트린 정책에 따라 미군이 철수하면서 여성들이 함께 빠져나갔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임진면(문산읍)에는 문산극장, 문산복지관, 세기극장, 서부극장이 있었고, 파평면에 장마루극장, 신영극장 아동면(금촌동)에 금촌복지관, 금촌극장 주내면(파주읍)에 문화극장, 전진극장 천현면(법원읍)에 해동극장 광탄면에 광탄극장, 적성면에 적성극장 등 7개 지역에 13개의 영화관이 있었는데, 이중 세기극장과 서부극장은 극장 이름을 바꿔 운영했다. 다목적극장인 복지관의 ‘쇼쇼쇼’는 가장 인기 있는 볼거리였다. 파주의 영화 간판 대부분을 도맡아 그렸던 차명천 씨는 “인기 코메디언 구봉서, 곽규석, 서영춘, 백남봉, 백금녀 등과 가수 이미자, 현미, 자니리, 위키리, 태원, 황금
“친어머니는 생후 4개월 된 저를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 입양시켰습니다. 제가 살던 코네티컷 주는 백인 중산층들이 사는 동네입니다. 제 얼굴 생김새가 아몬드 모양의 눈매에, 코는 납작하고, 피부는 연한 올리브색이어서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인들은 생김새가 남다른 저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니었던 저는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생김새에 대해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깊숙이 묻어둔 채 저는 외로움과 고립의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1987년 김해에서 남자아이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된 이익종 씨의 모국(한국) 방문 소감이다. 이익종 씨를 비롯 세계 각국으로 입양된 40여 명이 파주시가 반환 미군부대 캠프 하우즈에 조성한 ‘엄마 품 동산’을 찾았다. 장맛비가 쏟아진 26일 입양인들은 엄마의 자궁을 형상화한 조각상 등을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리고 파주시에 고마움을 전했다. 최종환 파주시장 당선인은 ‘엄마 품 동산’을 찾은 입양인과 모국 방문을 추진한 미국의 비영리단체 미앤코리아 관계자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입양인들은 이날 판문점과 광탄 마장호수 출렁다리, 헤이
“뼈 빠지게 농사지으면 뭐해요. 먹거리가 천덕꾸러기가 된 세상인데요. 아무리 편하고 좋은 세상이라고 한들 농산물이 대접을 받지 못하면 좋은 세상이 아니에요.” 밭에서 감자를 캐던 중 옛 쌀방앗간 설명을 부탁받고 달려온 주익환(78) 씨가 한 말이다. “여기 입구에 벼를 쏟아부으면 승강기 안에 바가지가 벼를 퍼 올려 도정이 시작되는데, 저쪽 뒤에 있는 바람구멍으로 쌀껍데기 왕겨가 벗겨져 나가고, 그 옆에 돌을 골라내는 석발기를 거치게 됩니다. 그리고 저기 저 마지막 통에서 반짝반짝하게 쌀에 광을 내면 하얀 쌀이 쏟아져 나오지요.” 마지방앗간은 한국전쟁 때 서너 차례 피란을 반복하다가 1960년대 지어졌다. 식현리와 붙어 있는 이 마을에는 미군과 터키군이 주둔했었다. 방앗간에는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 쇠바퀴 수십여 개에 크고 작은 피대(벨트)가 그대로 걸려 있다. 이 쇠바퀴를 움직이는 것은 손으로 시동을 거는 발동기였다. 지금은 버스 엔진으로 사용하고 있다. “발동기로 벼를 찧는 것보다 버스 엔진으로 찧는 것이 훨씬 쌀이 좋아요. 통통 퉁퉁거리는 발동기는 동력 전달이 불규칙해 쌀이 어느 때는 세게 부딪쳤다가 또 어느 때는 아주 느리게 회전해 쌀에 광도 잘
예전에는 여관방에서 밤을 보내려면 숙박인 명부에 이름과 본인을 증명할 수 있는 사항을 기재해야 했다. 그리고 한밤중에 잠을 자고 있으면 경찰이 임시검문(임검)을 나와 숙박인 명부에 기재된 내용과 숙박인이 같은 사람인지 확인을 하곤 했다. 깐깐한 여관 주인은 아예 주민등록증을 제출받아 직접 숙박인 명부를 작성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1980년대까지 파주군 숙박업 현황을 보면 여관, 여인숙 등 숙박업소가 134곳 있었다. 이중 적성면에 38곳으로 가장 많았고, 문산에 35곳, 금촌에 28곳, 파주에 9곳, 파평에 7곳, 법원에 6곳, 광탄에 5곳, 조리에 4곳, 월롱에 2곳, 탄현에 1곳이 있었다. 적성면에 숙박업소가 많았던 이유는 군부대의 영향이 큰 것으로 짐작된다. 게다가 당시 북파주의 대중교통이 하루에 두서너 번 버스가 다닐 정도여서 당일치기로 군대 간 아들 면회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 숙박시설은 대부분 무허가 영업이었다. 그러다가 60년대 들어서서 행정기관에 신고를 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파평면 장파리에 삼화, 황해, 한일여관이, 법원읍에 밀림, 명신여관이, 광탄면에 예사랑과 우일여관이, 문산과 금촌에 각각 반도여관과 성심여관이
“가을걷이 때 소달구지를 타고 밥재(적성면 식현리 국사봉) 고갯길을 오르면 무장한 터키군이 막 쫓아와 끌어내리곤 했어요. 왜 소를 힘들게 하느냐며 걸어서 가라는 거였지요. 터키 사람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었거든요. 그리고 식현리에는 군복 수선집이 아주 많았어요.”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부대에서 통역을 맡았던 윤상현(85) 씨의 회고이다. 한국전쟁 당시 적성면 식현리 밥재 고갯마루에 터키군 부대가 있었다. 터키군은 연합군 중 가장 용맹했다. 그래서 미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받았다. 터키군이 경기 양주와 용인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파주에 주둔하게 된 때는 1961년께이다. 터키군 부대 주변은 미군 기지촌과는 달리 술집이나 양복점 등이 거의 없었고, 대신 군복 수선집이 많았다. “터키 군인들이 한국에 올 때 삼베옷 같은 것을 입고 왔어요. 그러면 미군들이 군복을 지급했는데 그 군복이 미군용이라서 몸에 맞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연히 옷 수선집이 많이 생겨난 거죠.” 윤 씨가 식현리에 옷 수선집이 많았던 이유를 설명했다. 터키군은 한국전쟁에 1개 보병여단 5,455명이 참전해 741명이 사망하고 실종 163명, 포로 244명, 부상 2,068명 등 총 3,
한국전쟁과 함께 조리, 금촌, 월롱, 광탄, 파주, 법원, 문산, 파평 등 파주시 대부분 지역에 형성된 미군 기지촌에서 태어난 혼혈인과 해외 입양인을 위한 ‘엄마의 품 동산’이 오는 7월 문을 연다. ‘엄마의 품 동산 자문단’은 최근 조리읍의 반환 미군부대 캠프 하우즈 현장을 방문 파주시 관광과 성삼수 과장으로부터 추진 현황을 듣고 의견을 나눴다. 자문위원으로는 ‘엄마의 품 동산’ 조성을 제안한 현장사진연구소 이용남 사진가와 경기일보 김요섭 기자, 전미애 전 파주시의원, 최귀남 파주시 건설과장 등이 참여했다. 자문단은 엄마의 품 동산이 기지촌 여성과 해외 입양인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트라우마센터와 해외입양역사관 등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엄마의 품 동산’ 조성은 2015년 9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개최된 한국 혼혈인 콘퍼런스를 시작으로 2017년 11월 총사업비 5억 원을 들여 착공했다. 파주시는 오는 7월 준공식을 한 뒤 9월 10일 서울대학교에서 해외입양인 콘퍼런스를 진행하고 12일 ‘엄마의 품 동산’ 기념식을 가질 계획이다.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미앤코리아’(대표 김민영)는 ‘엄마 품 동산’에 설치할 조형물을
롯데아울렛 파주점의 불꽃놀이를 두고 인근 주민과 환경단체가 중단을 요구하고 나선 가운데 지방선거에 출마한 후보들도 영업용 이벤트 행사가 주민생활을 침해하면서까지 진행될 필요가 있는지 따져봐야겠다는 입장이어서 논란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롯데아울렛 파주점은 지난 2일과 3일 오후 8시 10분께 이벤트 행사로 5분 동안 불꽃놀이 폭죽을 쏘아 올렸다. 파주점은 지난해 추석 연휴를 시점으로 올해는 어린이날에 이어 매 주말에 불꽃놀이를 진행했다. 롯데아울렛 파주점 인근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2일 불꽃놀이 현장에 나와 불만을 토로했다. 한 주민은 “북한에서 포를 쏘는 줄 알았다. 롯데아울렛에 여러 차례 항의를 했지만 귓등으로 듣는지 전혀 개선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라고 분개했다. 파주환경운동연합 정명희 사무국장은 “폭죽이 폭발할 때 마그네슘, 구리, 바륨 등 중금속 성분이 발생되고 이산화질소, 이산화황 등의 오염물질이 유독가스와 함께 미세먼지로 생성돼 땅에 떨어지고 있다. 특히 폭죽 소리에 놀란 새들이 깜짝 놀라 무더기로 날아오르다가 서로 부딪혀 떨어지는 등 철새도래지의 파괴가 우려된다.”라며 즉각 중단을 요구했다. 이에 롯데아울렛 파주점 관계자는 “앞으로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메어리드 맥과이어를 비롯한 세계 16개국 30여 명으로 구성된 국제여성대표단 등 ‘2018 여성평화걷기’ 행사 참가자 1,000여 명은 26일 4.27 판문점 선언 지지 및 북미회담 성공과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며 임진강 통일대교를 건너 도라산 평화공원까지 5.5km를 행진했다. 한영수(한국 YWCA연합회 회장) 2018 여성평화걷기 조직위원회 공동대표는 “우리는 남과 북이 어우러져 사는 희망을 품고 이 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미국의 갑작스러운 북미정상회담 취소에 낙담했으나 오늘 또 기대를 안고 꿈을 꾸게 된다.”라고 밝혔다. 이날 파주 출신 더불어민주당 윤후덕 국회의원과 최종환 파주시장 후보 등도 행사에 참가했다. 사진= 이용남. 조영애 기자
멸종위기종인 수원청개구리 파주 서식지가 생태교육기관인 지구사랑탐사대의 대규모 탐사활동으로 짓밟혀 지역 주민과 환경단체가 반발하고 있다. 언론협동조합 파주바른신문은 22일 파주환경운동연합(공동의장 김정헌, 노현기)과 함께 공릉천 수원청개구리 서식지를 찾았다. 현장에는 수원청개구리 서식지 풀숲을 사람들이 밟고 다닌 흔적이 역력했다. ‘어린이 과학동아’ 지구사랑탐사대 어린이회원 등 50여 명은 지난 20일 저녁 교하 공릉천 일대 농경지와 수로에서 탐사활동을 벌였다. 탐사대는 논두렁 풀을 헤집거나 논에 들어가 수원청개구리를 포획해 사진을 찍었다. 인솔자는 포획한 수원청개구리를 거꾸로 들고 설명하거나 배를 눌러 울음소리를 녹음하기도 했다. 이렇게 잡아 촬영한 수원청개구리 사진 70여 장은 ‘어린이 과학동아’ 누리집 탐사활동에 올라와 있다. 파주환경운동연합 정명희 사무국장은 “생태교육기관이 기본적인 탐사교육도 없이 대규모 인원을 데리고 서식지 탐방에 나선 것이나, 모내기를 막 마친 논에까지 들어가 어린 모를 짓밟으며 탐사활동을 벌이는 것은 아이들에게 오히려 나쁜 교육만 심어 준 것이다. 특히 인솔자가 수원청개구리를 거꾸로 들고 설명하는 모습은 정말 생태교육의 순수
“우리 아들도 거기 다녔지요. 얼굴색이 다르다고 유치원 친구들이 놀려대서 선유리 언덕배기에 있던 명신국민학교에 보냈어요. 처음 이 학교에 운동장이 없어서 미군 공병대에 얘기해서 산을 깎아 운동장을 만들었어요.” 아들이 흑인 혼혈인 박 아무개 씨의 기억이다. 명신국민학교는 1966년 7월 4일 파주군 임진면(문산읍) 선유리 772번지 3,072평에 12학급 720명으로 설립허가를 받아 같은 해 9월 26일 3학급 94명 강석국민학교로 개교했다. 그러다가 1968년 9월 16일 학교법인 강석재단이 명신재단으로 바뀌면서 교명도 명신국민학교로 변경됐다. 당시 강석학원(이사장 이호은) 설립허가 신청을 받은 파주군교육청은 경기도교육감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서를 제출했다. ‘사립 강석국민학교의 설립 위치가 군용지로 사용되고 있으나 강석학원이 군 징발지 해제 신청으로 해결했다. 본 학교 부지는 문산국민학교 학구로서 파주군에서 아동수가 가장 많고 교실 난에 있으며, 선유리에서 문산까지 통학거리가 4km가 되는 데다 군용도로의 교통 폭주로 통학 위험성이 크다. 또한 본 부지는 분교설치 예정지로 물망에 올랐던 곳으로 학교 설립의 필요성이 있다.’ 설립인가를 받은 강석국민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