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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소식

제5부 “칠판에 그려졌던 손바닥이 그립습니다.”

 


그때가 19693월이었어요. 한 선생님이 1학년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아무 말도 없이 칠판에 손바닥을 그리더니 손 가운데에 이라고 써 넣고는 이게 내 이름입니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우린 그냥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오손근?’ ‘손오근?’만 외치다가 결국 손근이라는 걸 못 맞췄어요.”

금촌재건중학교 졸업생의 입학식 기억이다. 수학을 가르쳤던 손근 선생님은 파주시청 과장 퇴직을 한 후 현재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살고 있다.

 

 금촌재건중학교는 1966파주군립도서관금촌복지관’(극장) 부속 건물로 이전하면서 그 자리에 학생 90명과 교직원 6명으로 설립됐다. ‘파주군립도서관은 교하 문발리 출신 이달형(90) 교하면장이 1958농촌교육사회사업복지학원을 세워 운영할 당시 서울시로부터 기증받은 책을 중앙통신교재로 독학을 하는 청소년들의 주말 학습을 돕기 위해 독서실로 시작했다가 196370(103) 건물에 국한서와 양서 등 2,800여 권의 규모로 파주군립도서관을 정식 등록했다.

 

 금촌농협 안광헌(74) 전 조합장은 금촌 달동네 침례교회 위쪽 공터에 천막교실이 있었는데 주말이면 거기에 가서 책을 빌려 보거나 모르는 문제를 군인 선생님들한테 물어보고는 했다. 재건학교는 농촌복지학원이후 생겼다.”라고 기억했다.

 

 금촌재건중학교는 1974년 학생 수가 110명으로 늘었다가 75년에는 다른 학교로 편입하는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71명으로 급격하게 줄었다. 이는 재건학교가 정규 학력을 인정받지 못해 한 학년을 낮춰 편입하는 학생이 많았기 때문이다. 재건학교는 1976새마을청소년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당시 학교장은 고 박광위(1926년생) 파주문화원장이 맡았다. 박광위 교장은 문산농업중학교를 나와 중앙대 문리대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금촌재건중학교는 금촌 우시장(가축시장) 옆 주변 파주세무서와 침례교회 사이에 있었다. 길게 늘어선 판잣집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나무말뚝을 양쪽으로 박아 만든 흙계단이 깎아지르듯 나타나는데, 그 계단을 오르면 작은 운동장 가장자리로 슬레이트 지붕의 벽돌 건물과 천막교실이 있었다.

 

 장날이면 파주는 물론 고양, 연천 등 인근 지역의 한우 수백여 마리가 장사진을 이뤘다. 우시장 바닥에는 소를 묶어 두는 쇠말뚝이 촘촘히 박혀 있고, 소를 팔고 사려는 농민들 틈에서 목청 높이는 소장수의 침 튀기는 흥정 소리, 일을 부리기 위해 소의 코를 뚫어 코뚜레를 매자 터져나오는 소울음 소리가 우시장을 흔들었다.

 

 우시장 주변에는 새벽길을 나선 소장수들을 맞는 국밥집과 선술집이 즐비했고, 5원씩 내고 일을 보는 공중화장실 뒤 골목에서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요정집(방석집) 아가씨들이 소판 돈을 두툼하게 쥔 사람들의 팔소매를 잡아끄는 광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금촌재건중학교 재학생들의 나이는 천차만별이었다. 심지어 결혼을 한 학생도 있었고, 다른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온 학생들도 많았다. 그래서 같은 학년이면서도 형이나 누나로 부르는 것은 다반사였다. 재건학교도 정규학교와 같은 교복을 입었다. 교복은 기성복이 없을 때여서 대부분 금촌의 화성라사등 양복점에서 맞췄다. 그리고 짜장면은 주로 덕성원에서 먹었고, 사진은 동화사진관에서 찍었다.

 

 교사들은 거의 무보수 봉사였다. 선생님이 부족할 때는 장파재건중학교와 교환 수업을 하기도 했다. 수학을 가르친 손근 선생님, 영어 황학송 선생님, 생물 김용성 선생님이 있었고, 한쪽 다리를 저는 국어 선생님 등이 학생들을 가르쳤다. 특히 손근 선생님은 학생 문학동아리를 만들고 금촌복지관(극장)을 빌려 시화전을 여는 등 문학 활동에 큰 관심을 가졌다.

 

 금촌재건중학교 운동회는 20km 밖에 있는 장파재건중학교에서 학교 간 체육대회 교류 형식으로 진행됐다. 장파재건중학교 운동장은 학교와 떨어져 있었는데, 지금의 장파2리 마을회관 옆에 있었다.

 

 이렇듯 재건중학교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하지 못했거나 배움의 기회를 놓쳐 학업을 포기한 청소년들에게는 꿈과 희망의 배움터였다. 그러나 재건이라는 이름은 사회적 편견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부랑아들이 가는 곳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로 자신이 재건중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해 취재에 어려움이 많았다.

 

 언론협동조합 파주바른신문은 그동안 파주시 파평면의 장파재건중학교, 교하동 교하재건중학교, 파주읍 애향재건중학교, 법원읍 덕성재건중학교, 금촌의 금촌재건중학교를 취재했다. 이중 학교 건물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는 곳은 장파재건중학교와 애향재건중학교이다. 이 학교 건물을 파주의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조례가 시급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파주바른신문은 제5부 금촌재건중학교를 끝으로 파주의 재건학교 연재를 마치고, 이어서 파주 최초의 사립초등학교와 북파주에 밀집됐던 영화관을 탐사 보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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