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이 고등학교 때 장파리 ‘DMZ클럽’에서 수습밴드로 있었어요. 그러다가 잠시 ‘블루문홀’을 왔다 갔다 했지만 주로 ‘DMZ클럽’에 있었죠. ‘라스트찬스클럽’에는 없었어요. 거기는 가수 정훈희 남편 김태화밴드가 있었습니다.”
1960년대 장파리와 용주골 등 기지촌을 무대로 주먹 생활을 했던 김 아무개(73) 씨의 증언이다. 음악에도 소질이 있던 김 씨는 60년대 장파리 미군클럽을 제집 드나들듯 했다.
“당시 장파리는 파평면이 아니라 적성면이었어요. 임진강 건너에 미군부대가 있어서 일과를 마친 미군들이 저녁이면 몰려나왔죠. 미군클럽이 ‘DMZ클럽’, ‘블루문홀’, ‘메트로홀’, ‘럭키바’, ‘라스트찬스’, ‘나이트클럽’ 등 6곳이 있었어요. 클럽마다 모두 전속 밴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죠. 내 기억에는 DMZ클럽에 앳킨스밴드, 블루문홀에 혹부리밴드, 라스트찬스에는 4인조로 구성된 김태화밴드가 있었습니다. 김태화밴드는 나중에 밴드 이름을 ‘라스트찬스’로 바꿨습니다.”
“조용필은 18살 때인가 DMZ클럽에 잠깐 왔다가 며칠 못 있고 갔어요. 깜보음악(흑인 락)을 배우러 왔던 것 같아요. 아마도 그때 조용필이 장파리를 떠나 용주골 세븐클럽에서 기타 연주를 하다가 이후 의정부로 자리를 옮겼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조용필은 가왕 35주년 기념 콘서트를 앞두고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고등학교 때 자취생활을 하면서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기타를 치게 됐죠. 그때 베이스 기타 치는 친구가 미8군하고 연결돼서 ‘앳킨스’라는 그룹을 만들어 파주 장파리 DMZ클럽 등 지방의 기지촌을 돌았고, 그게 발전해서 나중에 ‘화이브 휭거스’ 오디션을 보게 된 거죠. 앳킨스라는 이름은 당시 베이스 기타 치던 친구가 지었어요. 그 친구가 앳킨스라는 이름에 그렇게 애착을 갖더라구요.”
“프로로 음악생활을 시작했던 때는 1969년부터예요. 미8군에서 등급을 매기는데 저희는 싱글 A를 받았죠. 더블 A는 하사관 클럽에서 컨트리 음악을 연주하는 쪽이었으니까 우리는 장파리에 있는 DMZ클럽에 들어갔어요. 이때가 화이브 휭거스였죠.”
조용필은 장파리의 ‘DMZ클럽’과 ‘라스트찬스’, ‘데블스’ 등의 그룹밴드, 그리고 문산 용주골의 미군 상대 클럽밴드 첵돌스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다가 그룹 화이브 휭거스의 리드기타를 거쳐 1970년 김대환(드럼)의 권유로 최이철(기타, 베이스)과 함께 김트리오를 결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