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항쟁을 기록한 현장사진연구소 이용남 사진가의 카메라에 경찰의 최루탄을 묵묵히 이겨내는 시민들의 모습이 잡힌다. 미친개 날뛰듯하는 지랄탄과 바람을 가르며 떨어져 꽃으로 산화하는 화염병을 민주주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던 그 거리의 사람들이 바로 민주항쟁의 주역이었다. 최루탄이 터져 마치 안개 낀 듯 희뿌연 골목에서 한 가족이 콧물과 눈물로 범벅이 돼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종로서적 셔터에 갇힌 여성과 버스, 지하철 대중교통의 아침저녁 풍경은 그야말로 눈물바다다.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채 명동거리를 걷는 여성들과 노인들의 모습에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힘든 여정인가를 카메라 셔터는 놓치지 않았다. 민주항쟁의 주역이었던 거리의 시민들에게 바치는 노래를 국회의원 보좌진을 거쳐 경기도의원과 파주시시설관리공단 이사장을 지낸 임우영 이사장이 불렀다. 임 전 이사장은 ‘광야에서’를 부르면 1980년대 민주화 물결을 타고 광화문, 명동, 종로 거리를 누볐던 유월의 그 기억이 떠오른다고 한다. 임우영 전 이사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1984년 군 제대와 함께 시작한 일이 야당 국회의원의 보좌진이었다. 당시 민한당에서 신민주당, 통일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야당의원의 보좌진 활동
민주항쟁 그때 그 거리가 하얗다. 최류탄, 지랄탄이 그랬고, 하얀 상복의 장례 행렬이 그랬다. 백골단의 반쯤 잘린 손가락장갑이 겨드랑이를 끼고 몸뚱이를 들어올린다. 그렇게 닭장차에 실려 간 경찰서 유치장이 만원이다. 닭장차가 한참을 내달려 경기도 미사리 강변에 멈춘다. 내동댕이쳐진 그곳 강변의 모래알이 서쪽 노을에 발갛게 물든다. 우리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게 됐다. 그 하얗던 거리는 촛불로 채워졌다. 그래도 주한미군은 건재하고, 국가보안법 역시 건강하다. 다시 유월이 왔다.
1991년 경원대 천세용 열사가 경찰 폭력에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 학우 폭력 살인 자행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위한 결의대회’ 도중 분신했다. 천세용 열사는 1991년 5월 3일 오후 3시께 결의대회가 시작되자 경원대 국기 게양대 난간에서 온몸에 신나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 채 “6천 경원대 단결 투쟁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라고 외치며 6m 아래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천세용 열사는 당시 명지대생 강경대 치사사건을 비롯 전남대 박승희 열사와 안동대 김영균 열사의 분신으로 전국적 집회가 잇따르고 있는데도 경원대 학생들이 축제와 체전 분위기에 들떠 집회 참석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천세용 열사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동북고를 졸업하고 경원대 전산과에 입학했다. 열사는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낮에는 일용직 건설노동자로 일하는가 하면 세차장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고 밤에는 야간강좌를 들으면서 경원대 민족사연구회 ‘한얼’에 가입하는 등 적극적인 교내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경희대 학생운동권 출신 최종환 파주시장이 불렀다. 최 시장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 행
1991년 5월 25일 대한극장 앞 진양상가 골목은 폭력 경찰에 쫓긴 시위대가 넘어지면서 아수라장이 됐다. 사복 체포조 백골단이 시위대가 빠져나가려는 골목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넘어진 시위대를 무차별 구타했다. 그 골목에 25살 김귀정 열사가 있었고, 그때 세상을 떠났다. 1966년 서울에서 1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난 김귀정 열사는 부모가 노점상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악착같이 노력해 1985년 한국외대 용인캠퍼스에 입학했다. 그러나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학교를 중퇴하고 자동차 정비소에 취직해 부모님을 도우면서 다시 공부해 1988년 성균관대 불어불문학과에 들어갔다. 1991년 당시, 김귀정 열사와 함께 대한극장 골목에 갇혀 사복경찰의 폭력을 목도한 파주여성민우회 윤숙희 대표가 김귀정 열사 추모 30주기를 맞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윤 대표는 골목에서 어떤 남자의 도움을 받아 맨발로 도망쳐 집에 왔는데, 바로 그 골목에서 김귀정 열사가 숨졌다는 방송을 보면서 숨이 멎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사진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기록한 현장사진연구소 이용남 사진가의 작품이다
조선대학교 교지 편집장이었던 이철규 열사가 1989년 5월 전남 광주 저수지에서 참혹한 모습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검찰은 ‘실족에 의한 익사’라고 발표했지만 손목에는 묶였던 자국이 있었고, 다리에도 찔리고 긁힌 상처들이 있었다. 북한과 관련된 글을 실었다는 이유로 수배를 받고 있던 그에게는 현상금과 특진이 걸려 있었다. 1964년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난 이철규 열사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었다. 1982년 조선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하던 그는 학교에서 제적당했으며, 1986년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면서 가석방돼 1988년 학교에 복적했다 이철규 열사는 1989년 1월 조선대학교 교지인 ‘민주조선’의 편집장을 맡았는데, 교지에 실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련 내용이 문제가 돼 수배령이 내려졌다. 숨어지내던 그는 5월 3일 택시를 타고 이동하던 중 경찰관의 검문을 피해 달아났는데,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최근 ‘리영희재단’ 이사를 맡은 고형권 작가에게 이철규 열사를 기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탁했다. 한양대 학생운동권 출신인 고 작가는 흔쾌히 승낙하고 서대
“슬퍼하며 울고 있지만은 말아라. 그것은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너희는 가슴에 불을 품고 싸워야 하리. 내 서랍에 코스모스 씨가 있으니 2만 학우가 잘 다니는 길에 심어주라. 항상 함께하고 싶다.” 1991년 4월 27일 전남대생 박승희는 한 통의 유서를 남겼다. 그리고 4월 29일 오후 2시 ‘강경대 살인 만행 규탄과 살인정권 폭력정권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2만 학우 결의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5.18 광장으로 갔다. 집회가 시작되고 약 한 시간 뒤 전남대 ‘용봉관’ 뒤편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박승희 열사는 “노태우 정권 타도하고 미국놈들 몰아내자! 2만 학우 단결하라!”를 외치며 분신했다. 전남대 병원으로 옮겨진 박승희 열사는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박승희 열사는 1972년 4월 2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1남 2녀 중 둘째로 출생했다. 1990년 목포 정명여고 졸업과 함께 전남대 가정대학 식품영양학과에 입학했다. 역사소설 ‘남원성’의 저자 고형권 작가에게 박승희, 이철규 열사를 기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직접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한양대 학생운동권 출신인 고 작가는 흔쾌히 승낙하고 서대문형무소로 달려갔다. 그 역사적 장소에서 젊은 시절
파주바른신문과 현장사진연구소가 파주시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지난해 2월 23일을 시점으로 현장을 취재해온 사진과 영상을 “파주시 힘내라!”라는 주제로 올 12월까지 비정기적으로 전시할 계획이다 전시회는 이른바 ‘효도 백신’ 공간이 된 ‘파주시 코로나19 예방접종센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파주시 시민회관에 마련된 예방접종센터 2층은 어느덧 접종을 지켜보는 가족들의 ‘포토존’이 됐고, 어르신도 안내 직원에게 휴대폰을 건네주며 자신의 주사 맞는 모습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광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사진전의 배경 음악으로는 세계적인 팝페라테너 임형주의 코로나19 응원가 ‘너에게 주는 노래’가 사용됐으며, 사진은 1988년 창립한 현장사진연구소 이용남 사진가와 조영애 사진가의 사진으로 구성됐다. 파주시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4일 현재 총 1,038명이며, 1차 백신 접종자는 아스트라제네카 12,683명, 화이자 13,070명 등 총 25,753명이다. 현재 화이자 백신 수급 불균형으로 75세 이상 어르신 접종이 중단된 상태이며, 6일부터는 노인시설 1,239명을 비롯 75세 어르신 11,564명이 22일까지 2차 접종을 할 예정이다. 파주시는 또 60~74
다시 오월이다. 국가가 백골단에게 공권력의 이름으로 국민을 마음껏 패도 좋다고 했던 그 시절에 명지대 경제학과 강경대 학생이 다섯 명의 백골단 쇠파이프에 죽임을 당했다. 1991년 4월, 강경대는 겨우 열아홉 살 대학 새내기였다. 이 사건은 좁혀오는 경찰 진압을 피해 학교 담을 넘어 달아나려 했던 학생을 붙잡아 쇠파이프로 집단 폭행함으로써 독재정권의 공권력에 저항하는 분신 정국의 신호탄이 되었다. 강경대 열사가 숨진 3일 뒤 전남대 박승희 열사가 강경대 사건 규탄 집회 중 분신하였고, 5월 1일 안동대 김영균 열사가, 5월 3일 경원대(가천대) 천세용 열사가, 5월 8일 파주 출신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열사가, 5월 10일 노동자 윤용하 열사가 잇따라 분신했다. 파주바른신문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기록한 현장사진연구소 이용남 사진가의 사진과 민주당 윤후덕 국회의원이 직접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고 강경대 열사를 비롯해 독재정권에 항거해 분신한 민주열사들의 영전에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