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4월 15일 경기도 개성에서 창간된 ‘고려시보’는 일제강점기인 1939년 6월 “본사 주최 용지굴 탐사단 21명이 지난 11일 오전 9시 35분 개성역에서 경의선 열차에 올랐다. 문산역에서 내린 탐사단은 자동차 두 대에 나눠타고 ‘봉서산성’을 올라 문산평야를 굽어보고 걸어서 ‘용지굴’로 향했다.”라는 ‘용지굴’ 탐사 후기를 실었다.
당시 ‘고려시보’는 ‘용지굴’ 탐사를 이렇게 보도했다. “주내면장 유명근 씨의 안내로 굴 안에 들어서니 음산한 바람이 풍기어 나오고 암흑을 향하여 꺼지려는 촛불을 가리고 기어들어가는 일행은 아기자기한 탐사의 스릴에 온 몸의 신경이 찢어질 듯 긴장해진다. 몸을 새우처럼 꼬부리고 혹은 기어서 20간(40여 미터)쯤 들어가니 굴 안이 홀연히 넓어지고 천정이 80여 척(약 24미터)이나 되도록 높은데 푸득거리는 박쥐 소리에 고대신화에 나오는 신비스런 동굴이 연상되어 웅대한 자연 앞에 움츠려진 인간의 나약함이 느껴진다.”
그로부터 약 84년이 흐른 2023년 9월 22일 오전 10시 파주읍 연풍리에 있는 육군 전진회관 앞에 1사단 교훈참모 이정운 중령 등 군 관계자가 모였다. 곧이어 ‘용지굴’ 탐사단인 더불어민주당 윤후덕 국회의원과 손성익 파주시의원, 그리고 70년 전 ‘용지굴’에 들어가 놀았던 용주골 주민 유광용 전 파주군의원이 도착했다.
탐사단은 군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차량으로 군부대를 가로질러 부대 뒷쪽 담장 옆에 차를 세운 뒤 사람 키보다 높은 돼지풀을 헤치며 풀섶을 따라 비탈길을 걸어올라갔다. 곧이어 수리부엉이가 살고 있는 암벽과 함께 ‘용지굴’에 다다랐다. 용주골 주민들은 이 ‘용지굴’을 ‘박쥐굴’이라고 불렀다.
윤후덕 국회의원을 비롯한 탐사단은 암벽에 있는 두 개의 동굴을 확인한 결과 암벽 중턱의 동굴은 규모가 아주 작은 것이어서 ‘고려시보’가 보도한 동굴은 아닌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그 아래 입구가 좁은 동굴에서는 찬바람이 선풍기처럼 나오고 있었는데, 이는 함께 동행한 용주골 주민 유광용 씨가 어린시절 횃불을 들고 기어들어갔을 때 동굴에서 찬 바람이 나오던 옛 기억과 일치했다.
유광용 씨는 어린시절 들어갔던 용지굴을 이렇게 회상했다. “자세를 낮춰 한참을 들어가면 넓은 광장이 나타나고 박쥐들이 푸드덕거리며 덤벼들었다. 그리고 횃불을 약간 윗쪽으로 비춰보면 비스듬한 언덕 같은 게 있었는데, 거길 약간 기어오르면 그 밑으로 연못 같은 게 있었다.”
‘고려시보’ 용지굴 탐사단은 “왼쪽 석벽으로 불을 밝혀 젖빛 같은 ‘종유석’의 천태만상 석벽을 30척(약 9미터)쯤 기어오르면 이 굴의 장관이 눈 앞에 나타난다. 탐스러운 ‘석화송이’ 고드름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석순’의 기이한 모양, 폭포처럼 흘러내린 ‘종유석’의 기이는 탐사단의 경이를 북돋아 줄 뿐이다. ‘종유석’의 한 푼 두께가 결성되려면 300년이 걸린다니 이 굴이 생긴 지가 몇 천년인가, 아니 몇 만년인가 혀를 휘둘게 된다. 다시 오른편으로 천신만고 기어들면 80여 간(약 150미터)이나 양장처럼 굴곡이 심한 좁고 혹은 넓은 굴이 벌어졌다. 그 굴을 더듬노라면 양편으로 무수한 굴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시험삼아 내리질린 굴에 돌멩이를 던지면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아득히 귓가에 울리어 길을 잃으면 저승 길목으로 추락하는 판이라 오싹 찬소름이 끼친다.”라는 후기를 전하고 있다.
용이 아직 승천하지 않고 땅에 서려 있다는 뜻의 ‘반룡산’ 기슭 ‘용지굴’을 탐사한 윤후덕 의원은 용지굴 입구가 돌과 흙으로 막혀 있어 이를 제거한 후 2차 답사를 하는 게 좋겠다며 육군 협력관 김문규 대령과 전진부대 교훈참모 이정운 중령 등 군관계자에게 동굴 입구 정리 등의 협조를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