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시기 미군부대 주둔과 함께 형성된 옛 기지촌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파주시민참여연대(대표 박은주)는 2일 ‘파주역사올레’의 3번째 순서인 ‘미군부대와 파주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옛 기지촌을 탐방했다.
이날 아침 파주종합운동장에서 관광버스로 출발한 20여 명의 올레단은 1960년대 전국 최대 규모의 기지촌으로 알려진 파주읍 용주골 민방위교육장에 도착했다. 올레단은 현장사진연구소 이용남 사진가의 안내로 흑인과 백인클럽이 있던 골목을 탐방하며 기지촌의 형성 과정과 성황기, 쇠퇴기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올레단은 70년대 초 미군부대가 철수하기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흑인지역과 미군휴양소 RC1(레크레이션센터), 문화극장 등 상점이 즐비해 있던 용주골 1번가를 지나 클럽과 미군위안부 숙소가 밀집돼 있는 백인지역 골목을 한 시간여 걸었다. 골목은 사람 한 명이 가까스로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무척 좁았다.
기지촌 탐방에 아들과 함께 참여한 이필년 씨는 “60년대에는 큰 도시였을 것 같은데 지금은 이렇게 죽은 도시처럼 되었다. 이땅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라며 아들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올레단은 파평면 장파리로 이동했다. 장파리의 옛 지명은 장마루촌이다. 버스가 장파초등학교 앞에 정차했다. 올레단은 60년대 미군이 지어 준 재건중학교 건물과 정미소 벽에 전시된 장마루촌 옛 모습 사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장마루촌은 나즈막한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임진강이 흐르고 있다. 그 임진강을 건너는 다리가 하나 있는데 ‘리비교’ 혹은 ‘북진교’로 불린다. ‘리비교’는 미군 리비 중사의 이름을 따 붙여졌다. 장마루촌에는 미군부대가 용주골처럼 마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임진강 건너에 있었다. 그 때문에 주말이면 ‘리비교’를 통해 걸어나오는 미군들과 이를 맞이하는 상인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60년대 파평면 인구는 약 1만3천여 명이었다. 장마루에 장마루극장과 늘노리 신영극장이 있을 정도로 문화적 혜택도 있었다. 달러가 유통되는 미군클럽 역시 ‘라스트챤스’를 비롯 7개가 성업했다. 그런데 현재 인구는 4천여 명에 불과하다.
올레단은 60년대 번성했던 기지촌이 왜 이렇게 낙후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이에 대해 파주시민참여연대 박은주 대표는 “한국전쟁과 더불어 미군부대 주변으로 기지촌이 형성되면서 미군을 상대로 한 서비스산업이 번창했다. 이 때문에 농사를 지어 생활하던 원주민들은 제조산업인 2차산업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미군 빨래를 해주는 등 노무자로 전락했고, 이후 서비스 대상인 미군이 철수하는 바람에 지역공동화 현상이 나타났고, 그것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어 국가 차원의 관심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파주시민참여연대가 일반 시민을 공개 접수받아 진행한 ‘파주역사올레’는 옛 미군클럽 라스트챤스에서 박병수 사무국장이 준비한 단막극 관람을 끝으로 마감됐다.
조영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