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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인의 분 냄새에 취해 그만...” 리비교로 내달렸던 악몽


장파리의 이발사’, ‘장마루촌의 이발사라는 소설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 그 소설을 읽었는지, 누가 썼는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논산에서 훈련을 마친 후 여기저기 보충대를 거쳐 장파리에 도착하면서 제일 먼저 떠올랐던 단어이다.

 

40여 년이 흘렀다.

살아가면서 문득 문득 장파리가 생각나고 리비교가 생각났다.

리비교, 그리고 허름한 술집... 가끔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변해 버린 파주 주변을 갈 일이 있으면 스쳐라도 볼 생각으로 내비를 검색해 봤으나 리비교는 검색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막연히 리비교라는 다리가 없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작년 문득 파평면을 지나다 그 어디쯤 되는 것 같아서 작정을 하고 리비교와 장파리를 찾았다. 그런데 리비교는 사용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고 출입구를 찾을 수도 없었다. 술집과 다방으로 넘쳐나던 장파리는 세월을 뛰어넘은 듯 흔적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 기억 속의 리비교는 이랬다.

좁은 2차선 도로를 100여 미터 들어가면 리비교 우측에 관사 같은 오래된 시멘트 건물이 있고, 다리 입구 좌측에는 헌병검문소가, 검문 초소 뒤에는 보안반 사무실이 있었다. 우리 부대를 가려면 약 300-400미터로 기억되는 리비교를 걸어서 건넌 다음, 다시 또 한 시간 정도를 걸어 들어가야 했다.

 

198010GOP에 배치를 받아서 이듬해 3월에 소위 훼바라는 곳으로 부대 이동을 하였기 때문에 리비교와 장파리에 대한 기억은 유난히 빨리 찾아온 가을과 혹한의 추위 그리고 엄청나게 쏟아졌던 눈에 대한 기억이 전부이다.

 

연대본부중대 교육계로 보직을 받았다. 서 병장이라는 사수는 제대가 4-5개월 남은 경남 진해 사람이었다. 마른 체구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어서 약간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인상이었다. 가끔 영화배우 박신양을 보면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군대 사수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부대 밖에 교육장이 있었다. 무슨 교육장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관리를 하지 않아 시멘트 벽돌이 다 깨지고 흩어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사실 연대본부중대는 각 부처별로 업무가 있어서 본부중대장 관리 하에 교육계획은 있지만 실질적인 교육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교육장을 보수하기 위해서는 시멘트 벽돌이 필요했다. 군수과에서 시멘트를 얻어 벽돌 찍는 기계를 사다가 벽돌을 직접 찍어 보수를 해야 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변소 간에 똥이 얼어서 탑처럼 뾰족하게 쌓이던 12월 어느 날, 사수와 둘이서 공용증을 끊어문산으로 외출을 했다. 교육장에 사용할 시멘트 벽돌을 찍는 형틀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벽돌 기계를 구입한 우리는 하루 종일 문산에 있는 여왕벌 다방에서 레지(아가씨)들과 노닥거리다 오후에 장파리로 돌아왔다.

 

당시 장파리의 겨울은 무척 추웠다. 이등병의 전방 군대생활은 참으로 추웠고 혹독했다. 난방용 기름과 찬물에 고참들 식기를 설거지하느라 손등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셔 피가 맺히곤 했다. 그래서인지 육군 이등병 조수와 병장은 약속이나 한 듯 장파리의 이름 모를 색시집으로 갔다. 그 당시 술값이 얼마였는지 어떤 술을 마시고 돈은 누가 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하여튼 둘이서 술집에 들어갔고, 홀도 아닌 따뜻한 방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날 따뜻한 아랫목과 처음으로 맡아보는 달콤한 여인의 분 냄새에 취해 우리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는 밤을 새우고 말았다. 눈을 뜬 순간 가슴이 덜컹했다. 귀대시간을 놓쳤으니 탈영병이 된 것이다. 우리는 군화 끈을 제대로 매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술집을 나와 리비교로 내달렸다.

 

이미 사건은 커져 있었다.

리비교 검문소 헌병들이 어젯밤 우리를 찾느라 장파리 시내를 다 뒤졌는데 못 찾았다고... 마침 본부 중대장이 외박을 나갔으니 중대장 들어오기 전에 빨리 부대로 복귀하라고 일러줬다. 이등병인 나와 사수인 병장은 그렇게 검문소를 통과해 리비교를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리고는 상상하기도 싫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위 글은 198010월부터 81년까지 파주 남방한계선 철책에서 군 생활을 한 권해진 사진가가 현장사진연구소에 보내온 글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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