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리비교 보수 보강공사 현장. ‘조국통일’에 이어 ‘남북통일’이라고 쓰여진 철빔이 들어 올려졌다. 그 옆에는 ‘단기 4286년 5월’이라고 적혀 있다. 한국전쟁 중인 서기 1953년이다. 이 철빔에는 한자로 ‘永久記念(영구기념)’과 임진강 다리 건설 현장을 뜻하는 이른바 코드명 X-RAY 작전에 투입된 ‘84건설대’라는 부대 이름이 쓰여 있다. 1953년 다리 공사에 측량사로 참여한 넬슨(Nelson S. Ladd)은 미국 재향군인회와의 인터뷰에서 “임진강 엑스레이 브릿지(리비교)는 아주 힘든 난공사였다.”라고 술회했다. 1931년 미국 캔자스 출신인 넬슨 상병은 전문 엔지니어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교량과 헬리콥터 착륙장 건설, 피란민 텐트촌 재건 사업 등에 투입됐다. 리비교 철빔에는 개인적인 여러 사연을 비롯해 조국통일, 남북통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의 구호와 평화를 기원하는 문구가 쓰여 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1947년 일제강점기 문예활동을 했던 안석주가 작사했고, 그의 아들 안병원이 서울대 음악대 재학생 시절 곡을 붙였다. 조국통일은 대체로 북한이, 남북통일은 남한이 사용하고 있다. 파주시는 리비교 앞에 한국전쟁 중 대전에서 전사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파주를 휩쓸고 있다. 마치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전국으로 확산돼 대한민국에 긴급재난경보가 선포되고 단 하나의 안전한 도시 부산까지 가기 위해 열차에 몸을 실은 사람들을 그린 영화 ‘부산행’ 열차를 탄 기분이다. 언론에서는 파주의 방역망이 뚫렸다고 한다. 적성의 한 마을, 아프리카돼지열병 양성 판정을 받은 돼지농장이 무등록 농가라는 사실조차 파악 못 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축사에는 멧돼지 침투를 막는 울타리도 없고, 음식물 찌꺼기 잔반을 먹이고 있다고도 했다. 그래서 방역망에 구멍이 뚫렸다는 것이다. 아프리카돼지열병 초기부터 집중취재를 해온 기자의 눈에는 우리에게 방역망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바이러스 감염 원인과 경로도 모르고, 이를 치료할 백신도 없고, 소독약의 효능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이런 캄캄한 상황에서 오직 할 수 있는 건 통제초소에서 24시간 철저한 소독을 하는 것 외에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국가가 아프리카돼지열병 감염 원인과 경로를 국민에게 알려주고 그에 맞는 백신을 제공했음에도 파주시가 방역을 게을리 해 감염이 확산되고 있다면 바로 그것을 방역망에 구멍이 뚫렸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저씨 그냥 지나가시면 안 돼요. 바퀴달린 건 다 소독을 하고 이름을 적으셔야 해요.” 태풍이 제주도에 상륙한 22일 파평면 늘노리 아프리카돼지열병 방역 통제초소를 슬쩍 지나가려는 음식배달 오토바이를 방역 담당 직원이 불러세웠다. “아니 아까도 했는데 또 해? 벌써 몇 번을 하는 거야.” 음식배달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파평면 장파리 농로에 설치된 방역 통제초소는 악명(?)이 높다. 방역 경계선을 단 한 발자국이라도 넘게 되면 무조건 소독을 하고 인적사항을 남겨야 한다. 오토바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외국인이 운전하는 차량 역시 여권에 기재된 이름과 연락처를 반드시 기록해야 한다. 파산서원 근처에 있는 통제초소의 경우, 행선지와 목적을 밝힌 후 농장 출입이 아니면 자동차 바퀴만 소독하는 것으로 통과할 수 있다. 적성면 장현리 초소도 만만치 않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차량은 모두 돼지열병 방역 소독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마을에서 나오는 차량은 기록만 받고 있다. 객현리 통제초소 역시 소독을 받아야 마을 진출입이 가능하다. 그러나 광탄면 마장리의 경우, 농장 출입이 아닌 일반 차량은 소독을 하지 않는다. 그냥 마음대로 들락날락 할 수 있다. 통제초소 관
한국전쟁과 함께 문산에서 금촌으로 피란한 파주군청 모습이다. 50년 전 파주시 상주 인구는 191,971명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3,643명 더 많았다. 이는 최대 규모의 미군 기지촌이 파주에 형성돼 미군 위안부 등 종사자가 전국에서 몰려들었기 때문으로 추산된다. 1968년 파주군청 공무원은 정규직이 245명, 임시직 133명이었다. 이중 군청 직원은 군수를 포함 122명으로 각각 국가직 56명, 지방직 56명이었으며, 임진면 등 11개 면 단위 공무원은 모두 지방직으로 임명됐다. 당시 파주군청 행정기구는 감사실과 문화공보실을 비롯 내무과, 재무과, 식산과, 농림과, 건설과 등 5개 과와 보건소, 지도소가 있었으며, 고등농민학원, 파주여자기술양성원, 도서관, 성병관리소 등으로 편성됐다. 2019년 8월 말 현재 파주시 인구는 465,280명이며, 공무원은 정무직 1명과 별정직 3명 등 1,460명으로 이중 남성은 787명, 여성은 673명이다. 현재 파주시청 청사는 1976년 건립됐다.
파주시가 헤이리 노을 숲길 준공식 언론 보도자료를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배포했다. ‘이날 준공식에는 최종환 파주시장과 윤후덕 국회의원, 박정 국회의원, 손희정 도의원, 이진 도의원, 손배찬 파주시의회 의장을 비롯해 지역 사회기간 단체장 및 주민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지역언론은 대부분 파주시가 배포한 보도자료를 그대로 인용해 ‘사회기간 단체장 및 주민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라고 보도했다. 맞춤법이 틀린 ‘사회기간 단체장’과 참석 인원 ‘300명’도 그대로 인용됐다. 사진은 21일 헤이리 노을 숲길 행사장 모습이다. 진행요원을 비롯 자리에 앉거나 서 있는 사람들을 모두 합하면 약 100여 명 정도이다. 파주시는 무슨 근거로 300여 명이라고 보도자료를 냈을까? 내빈 소개 방식도 여전히 정치판 일색이다. 47만 파주시를 이끌어가는 최종환 파주시장을 시작으로 윤후덕 국회의원, 박정 국회의원, 손희정 경기도의원, 이진 경기도의원, 손배찬 파주시의회 의장, 박은주 파주시의원, 이용욱 파주시의원, 최창호 파주시의원 등이 소개됐다. 정작 이날 행사의 주인공인 헤이리예술마을 한상구 이사장은 정치인 끝자락에 소개됐다. 취재진이 윤후덕 국회의원에게 “박정
민족지도자 장준하 선생 서거 44주년 추모식이 오는 17일 탄현면 성동리 ‘장준하 공원’에서 열린다. 본래 묘소는 파주시 광탄면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에 있었으나 2012년 8월 파주시가 조성한 통일공원으로 옮겼다. 장준하 선생은 1944년 일본군에 징집됐다가 6개월 만에 탈출해 광복군 간부훈련을 받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됐다. 해방 후에는 잡지 ‘사상계’를 간행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여러 차례 투옥됐으며, 유신체제 반대 운동을 벌이던 1975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 사진은 현장사진연구소가 기록한 ‘장준한 선생 새긴돌’이다. 1989년 6월 30일 통일의 길목인 파주시 장곡리 검문소 앞에 세워졌으나 이후 감쪽같이 사라졌다. 당시 새긴돌에는 장준하 선생의 약력을 이렇게 썼다. 장준하 선생은 단기 4251년(1918) 8월 27일(음력)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셨으며 젊은 날에는 독립군 대위로 일제와 싸우셨다. 8.15 해방 이후에는 한때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를 역임하시고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군사독재와 싸우시다가 그 싸움의 결정적 고비인 단기 4308년(1975) 8월 17일 박정희로부터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원
아들의 이름을 따 지은 호철상회는 금촌에서 제일 먼저 장이 섰던 문화로 뒷골목 구시장에 있었다. 지금은 건강상의 문제로 문을 닫았다. 그 자리에는 부부상회라는 이름이 붙었다. “처음엔 작업복 같은 남성복을 팔았어. 우리 애들이 고생했지. 우리야 부모니까 당연히 고생을 하는 거지만 애들이야 무슨 죄가 있어 그렇게 고생을 했는지.....지금이야 이렇게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만, 정말 우린 힘들게도 살았고, 열심히도 살았어.” 나무 궤짝으로 만든 돈 통에서 10여 개의 저금통장을 꺼내 보이며 어려웠던 시절을 얘기하는 이재희(85) 씨의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이 읽혀진다. 이씨는 한국전쟁으로 파평면 덕천리로 피란하기 전까지 적성면 장좌리에서 살았다. 이곳은 지금 주한미군 탱크 훈련장으로 변해 있다. 이씨는 파평 샘내시장에서 열여섯 살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10여 년간 장사를 하다가 탄현면 성동리 박영재(86) 씨와 중매 결혼했다. “1964년에 결혼을 했는데, 하필 그 해에 큰물이 나서 농사를 망친 거야. 옛날에야 집집마다 식구는 많은데 먹을 거리는 많지 않았잖아. 그래서 농사지어서는 온 가족이 먹고 살기 어려워 남편이 미군 부대에 취직을 하면서 살림을
칠흑의 밤. 비가 억수로 내리는데도 숲 모기는 군부대가 파놓은 길옆 진지에 숨죽여 있는 대학생들의 온몸을 물어뜯는다. 이틀간 양계장 일을 하며 갈아입지 못한 옷에 닭똥이 묻어 있어 더한 듯했다. 먼동이 트는 새벽하늘 사이로 빗줄기가 희미하게 보일 무렵 파평면 박석고개쯤에서 탱크 소리가 들려온다. 2002년 8월 3일 오전 5시 30분 파주 적성면 답곡리 농로.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생의 영정사진을 든 한총련 소속 대학생 13명이 ‘다그마노스훈련장’으로 이동하던 미2사단 캠프하우즈 소속 44공병대대 장갑차 40여 대의 행렬을 가로막았다. 학생들은 대형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장갑차 위로 뛰어올라 “살인 미군 처벌없이 훈련재개 웬말이냐! 재판권을 이양하고 부시는 공개 사죄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여중생들의 영정을 든 채 농로를 점거한 뒤 장갑차 궤도 밑에 머리를 들이밀고 누워버렸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미군들은 효순이와 미선이의 49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전차훈련을 시작했다. 이것이 미군이 말하는 사과이며 애도인가?”라며 미2사단의 훈련 재개를 비난했다. 장파리 일부 주민들은 시위 도중 폭우가 쏟아지자 미처 비옷을 준비하지 못한 학
시장 사람들이라면 한두 번쯤은 다 가봤을 금촌한증막이 한국전쟁 피란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64년 개성 사람을 불러다 지은 금촌한증막은 한수이북에서 가장 오래된 한증막으로 온종일 시장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장사를 했던 시장 사람들에게는 하루의 피곤을 풀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쉼터였다. 2005년 4월 현장사진연구소가 인터뷰한 이구순(당시 71세) 씨의 사연을 소개한다. “제가 시집을 온 다음 해에 한증막을 지었어요. 그때는 손님이 아주 많았어요. 지금은 뭐 찜질방인가 뭔가 그런 게 생겨서 손님들이 별로 없어요.” 금촌한증막은 1964년에 지어졌다. 현재 이구순 씨와 아들 우종민(당시 45) 씨가 운영하고 있다. 한증막을 함께 지었던 이씨의 남편 우상명 씨는 1980년 파평면 장파리로 친구들과 천렵을 갔다가 물에 빠져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떠난 남편이 참 야속해요. 저는 시집살이를 지독하게 했거든요. 집을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로..... 근데 그때마다 남편은 우리가 더 오래 살지, 부모님이 더 오래 살겠냐며 무조건 참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이 악물고 참았어요. 그런데 글쎄,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버리는 거예요. 어찌나 서운하고 야속
파주시청 26일 아침 8시 12분 풍경입니다. 폭염을 이겨낸 나무 숲 사이로 비가 내리고, 출근 공무원의 모습도 보입니다. 커피 한 잔 생각나게 하는 아침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출근 공무원 손에 들려 있는 쇼핑백에는 동료와 함께 나눌 커피가 들어 있습니다. 방금 전 시청 주변 카페에서 산 커피입니다. 비오는 날에는 종이와 플라스틱컵에 담긴 커피가 제맛일 겁니다. 멋있게 드십시오.
현장사진연구소가 금촌 전통시장 골목에 있는 새우젓 가게를 찾았다. 새우젓 가게는 문이 열린 듯 닫힌 듯했다. 그리고 20여 년 전 ‘시장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사진작업을 할 때 만났던 이경화 할머니가 5년 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84세였던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 현장사진연구소에 “내가 아들을 국가에 바쳤듯이 파주시도 전통시장을 활성화시켜 주면 고맙겠다.”라고 당부의 말을 했다. 이 말이 사실상 유언이 됐다. 이경화 할머니는 일제강점기인 1942년 중국 만주에서 결혼했다. 남편과 함께 북한 신의주와 흥남부두에서 살다가 스무 살에 해방을 맞아 전남 목포로 내려왔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떡을 머리에 이고 문전으로 다니며 생활하던 할머니는 인천으로 옮겨 하숙집을 운영하다가 1956년 금촌에 와 생선장사, 마늘장사에, 순대국밥을 팔다 금촌새우젓 가게를 차렸다. “고생? 아휴! 책을 열 권은 쓰고도 남을 거야. 고생한 보람이야... 애들 남한테 한 놈 안 주고 키운 게 보람이라면 보람이지. 생선은 머리에 이고 앞으로 한 놈, 뒤로 한 놈 들쳐업고, 또 한 놈은 걸리게 해서 저기 파평 샘내, 금파리 등지로 장사를 다녔지. 그때는 물건값
파주바른신문은 그동안 금촌 전통시장을 기록해온 현장사진연구소와 함께 ‘시장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세상을 떠났거나 장사를 그만둔 상인들의 사연을 연재한다. 그 첫 번째로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박봉조 할머니를 소개한다. 20여 년 전 금촌시장에서 만났던 박봉조(당시 65세) 할머니가 3년 전 세상을 떠났다. 현장사진연구소는 할머니를 촬영했던 그 자리를 다시 찾았다. 할머니가 쪼그려 앉아 있던 시장 모퉁이 골목에는 여전히 생선 비린내가 배여 있는 듯하다. 할머니는 당시 작은아들을 네덜란드로 음악공부를 보냈다고 자랑했다. 사춘기 그 시절, 시장 바닥에 앉아 장사를 하는 어머니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당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어머니를 피해 다른 길로 다녀야 했던 씁쓸한 기억은 간혹 드라마의 소재로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 시장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드라마가 아닌 현실이었다. 특히 결혼 3년 만인 스물아홉 살에 남편과 사별하고 두 아들을 억척으로 키워온 박봉조 씨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박씨는 인천 방직공장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은 금촌에서 새우젓 장사를 하는 동생에게 새우젓을 산지에서 직접 받아 보내는 일을 했다. 그런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박씨는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