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가 부활한 지 올해로 꼭 30년이다.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도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 1949년 제정되었고, 1952년 시도의회 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지방의회가 강제 해산됐다. 그렇게 중단됐던 지방자치는 1991년 지방의회 의원선거와 함께 부활했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장은 1995년까지 임명제가 유지되다가 1995년 6월 27일 지방의회 의원과 단체장을 뽑는 동시선거가 실시되면서 본격적인 지방자치 시대가 열렸다. 파주시의회는 1991년 3월 26일 파주군의원 선거와 함께 파주군청 건물에서 출범했다. 무보수 명예직이었다. 그럼에도 시민들의 민원을 발로 뛰어다니며 해결하는 등 나름의 책임감과 봉사 정신을 발휘했다. 이렇게 동분서주하는 과정에서 몇몇 의원들은 땅과 소를 팔아 의정활동비에 충당하기도 했다. 의장을 역임한 어떤 의원은 경조사비로 소 10마리를 팔았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러하니, 기초의회 의원에 당선되는 것이 무조건 반길 일은 아니었다. 무보수 명예직이 유급으로 바뀐 것은 2006년이다. 이제 의원들은 경조사비를 안 내도 되고, 세비로 연봉 3,600만 원을 받기도 한다. 게다가 업무추진비로 의장은 3,68
"아침 햇빛 찬란한 장명산 기슭…” 1907년 개교한 교하초등학교 교가 첫 구절에 장명산이 나온다. 그리고 교하중학교 교가에도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장명산맥 기슭일세”라는 구절이 있다. 장명산은 백두대간의 추가령에서 갈라져 한강과 임진강에 이르는, 민족정기가 서려 있는 한북정맥의 줄기다. 그런 장명산이 이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다. 일제가 단지 석회 생산만을 위해 장명산을 파헤쳤을까? 횟가마골은 장명산을 중심으로 왼쪽이 ‘벌언리 횟가마골’ 오른쪽이 ‘능거리 횟가마골’로 불렸다. 이 지역 앞을 흐르는 강을 ‘횟강’이라고 했는데 ‘하지석리’와 교하다리 사이를 ‘교하강’, 하류 쪽은 ‘방천’‘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모두 ‘공릉천’으로 부르고 있지만 낚시꾼들은 대부분 ’횟강‘으로 기억한다. 횟강에는 나룻배가 있었다. 이 나룻배는 1981년 곡릉천교가 놓이기 전까지 가루개(탄현 갈현리) 들녘에서 생산되는 벼와 농산물 등을 오도리와 하지석리로 실어날랐다. 횟강에는 매년 사람들이 빠져 죽었다. 그럴 때면 시신을 찾기 위해 여러 곳에서 수영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래도 시신을 찾지 못하면 어릴 때부터 횟강에서 물놀이를 했던 횟가마골 아이들이 불
횟가마골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2월 ‘조선중요광산물증산령’ 실시에 따라 교하면 오도리 장명산에 석회 생산 노동자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레 불리게 된 이름이다. 횟가마골 사람들은 대부분 북쪽에 고향을 둔 피란민이거나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지식인들도 꽤 있었지만 이 사람들은 횟가마골을 자신들의 인생 마지막 종착역으로 여기기도 했다. 장명광산은 산밑에 일자형 사택을 나란히 지어 노동자들에게 제공했다. 처음 광산에 들어오는 노동자 대부분은 이 사택에서 살다가 임대 기간이 끝나면 땅을 빌려 움막집을 짓거나 사택과 엇비슷하게 생긴 개인 집을 마련해 거처를 옮기기도 하였는데 그런 가정은 그리 많지 않았다. 횟가마골에는 구멍가게가 네 군데 있었다. 가끔 공릉천 낚시 손님을 상대하기도 했지만 거의 노동자들이 이용했다. 장명광산은 한 달에 두 번 급료를 지불했다. 사람들은 이를 ‘간조’라고 불렀다. ‘간조’ 날이 되면 구멍가게는 외상값을 갚으려는 사람들과 받으려는 사람들, 그리고 술꾼으로 북적였다. 주인은 외상값을 받아 고맙다며 술 한 병을 공짜로 내놓는가 하면, 외상값을 갚았으니 다시 외상술을 시작하는 노동자도 있었다. 그리고 간조가 나왔다는 소식을 귀신같이
1960년대 말 조리읍 봉일천 앞을 흐르는 공릉천에 캠프하우즈 공병여단 소속 미군들이 가마니에 모래를 담아 교각을 만들고 기름먹인 시커먼 나무 전봇대로 다리를 놓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건널 다리였다. 파주군은 공릉천 제방 둑에 임시로 마련한 천막에서 박 대통령에게 지하수 개발 정책 추진 현황을 보고했다. 당시 이 모습을 촬영하러 나갔던 문화공보실 직원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대통령과 저만큼 떨어져 있는데도 손발이 얼마나 떨리는지 카메라 초점이 안 맞는 거예요. 그래도 내가 해병대 출신인데, 용기를 내 대통령 앞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는데, 아, 키가 엄청나게 큰 경호원이 가로막으며 큰소리로 욕을 해대는데 아주 오줌을 쌀 뻔했었지…” 문화공보실 직원은 영어와 한자로 쓴 ‘NIEMI 橋’라는 다리 이름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고 한다. ‘NIEMI’를 찾아보니 핀란드어로 ‘반도’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한반도를 뜻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포지티브(Positive) 필름으로 촬영된 이 사진의 원판 필름은 현장사진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다.
무건리훈련장 확장으로 주민들이 삶의 터전이었던 법원읍 오현리 마을을 떠나고 난 뒤, 초대형 거미줄이 이 마을의 나무를 뒤덮었다. 초대형 거미줄에는 수많은 모기떼가 걸려들었다. 2007년 미국 텍사스 주 타와코니주립공원에서 발견된 거미줄과 같은 모습이다. 당시 미국의 곤충학자들은 “거미들이 ‘협업’식으로 거미줄을 쳐 이 같은 규모의 초대형 거미줄이 생겼을 것이다. 이례적인 사건이다”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2018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정원에서도 나무를 뒤덮은 수많은 거미줄이 목격되었다. 러시아 곤충학자들은 “나방의 유충인 애벌레들이 거미줄을 친 주범이다. 거미줄은 번식기가 오기 전 애벌레들에게 먹이를 먹기에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는데 이 때문에 초대형 거미줄이 생겼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초대형 거미줄이 만들어진 법원읍 오현리 마을은 4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10년 전 국방부의 무건리훈련장 확장 사업으로 모두 철거됐다. 주민들은 국방부가 마련한 법원읍 가야리 군부대 터로 이주하거나 양주시 등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무건리훈련장 조성으로 직천초등학교와 주민들이 오현리로 이주했고, 제2차 확장 사업으로 오현리 마을과 직천초등학교는 파주의 지
아름드리나무가 엄마 품 동산을 덮쳤다. 언제부터인지 자작나무 20그루 중 10그루가 고사된 채 서 있다. 기지촌 여성들이 자살하거나 맞아죽으면 남의 산에 봉문 없는 무덤을 만들어 몰래 묻은 후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노라며 그 표식으로 자작나무 가지를 꽂아놓았던 문산 미군부대 ‘캠프 게리오웬’ 뒷산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엄마 품 동산에 심은 자작나무 절반이 죽은 것이다. 그리고 조형물을 비추기 위해 잔디 위에 빙 돌아가며 세웠던 태양광 조명은 자기 자리에서 빠져 나와 여기저기 개똥처럼 나뒹굴고 있다. 지난 2월 관광과장은 미국으로 건너가 해외입양인들에게 약속했다. 아픔과 상처를 꼭 기억하겠노라고…
파주시의회 제215회 임시회 1차 본회의가 13일 열렸다. ‘코로나19’ 탓에 시의원, 공무원, 방청인 모두 마스크를 착용했다. 후반기 시의회 의장으로 꼽히고 있는 한양수 의원은 유일하게 검은색 마스크를 썼다. 시민단체 대표 출신 박은주 의원은 출석하지 않았다. 미래통합당 조인연 의원은 꽃무늬가 있는 마스크를 썼다. 아내가 헝겊으로 만들어 줬다고 했다. 본회의 시작에 앞서 ‘5분 자유발언’이 있었다. 5분 발언은 집행부의 시정 전반에 대해 시의원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마련된 제도이다. 이날 5분 발언을 신청한 의원은 미래통합당 조인연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이용욱 의원이다. 먼저 발언에 나선 조인연 의원은 마스크를 벗었다. 이용욱 의원은 마스크를 쓴 채 발언했다. 조 의원은 “아내가 만들어 준 마스크가 좋기는 한데 헝겁이라서 통풍이 잘 안 되는 바람에 인터넷 생중계를 시청하고 있는 시민들이 잘 듣지를 못할 것 같아서 벗었다. 아내에게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조인연 의원은 “미국의 진보 역사학자 토마스 프랭크는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를 고민했고, 유시민은 ‘국가란 무엇인가’란 그의 책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나 가난한 나머지
“엄마, 정말 기억이 안 나? 나야,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예쁜 딸. 그리고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베기 박’ 이모하고 사진작가 선생님도 왔잖아. 엄마 기억해봐. 엄마가 기억을 못 하면 나는 어떻게 아빠를 찾아...” 문산의 한 요양원에서 피부색이 조금 다른 딸이 엄마의 손을 꼭 잡고 한 말이다. 딸은 뇌경색과 치매성 질환으로 기억을 되살리지 못하는 엄마의 뺨에 연신 입을 맞춰보지만 환갑을 몇 년 넘긴 엄마는 그저 속절없는 표정만 짓고 있다. 딸의 깊은 눈물이 짙은 피부색에 투영돼 흐른다. 우리 근현대사의 기지촌 아픔이다. 딸은 이제 서른이 넘었다. 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단 한 번도 버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번듯한 직장에 취업도 했다. 돈을 모아 엄마가 기억하고 있는 아메리카 그 어느 곳을 찾아가는 꿈도 꾸었다. 자신과 닮았을 아버지의 모습도 엄마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엄마의 기억은 딸의 인생이다.
파주시가 반환 미군기지인 캠프하우즈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평화공간으로 조성한다. 언론협동조합 파주바른신문은 오랜 기간 파주 미군 기지촌을 기록해 온 현장사진연구소와 공동으로 캠프하우즈를 둘러싼 지역사회를 들여다본다. 캠프하우즈 고압선에 감전돼 사지를 잘린 건설노동자 전동록 씨의 장례식이 끝난 3일 뒤인 2002년 6월 13일 오전 9시 40분께 경기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 갓길을 걷던 신효순, 심미선 두 여중생이 미 제2사단 공병대대 44공병대 소속 부교 운반용 궤도차량에 깔려 숨졌다. 44공병대는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4리에 있던 캠프하우즈 미군부대이다. 주한미군 군사법정은 11월 20일 장갑차 선임탑승자 ‘페르난도 니노’ 병장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이틀 뒤에는 운전병 ‘마크워커’ 병장에게도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 결과에 분노한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몰려들었다. 촛불은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 개정을 요구하는 촛불 추모로 번졌다.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은 캠프하우즈 진입 시위를 벌였다. 대학생들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에서 다그마노스전차훈련장으로 가던 44공병대 탱크에 올라 항의했다. 미군이 세운 여중생 추모비에 새겨진 ‘
파주시의회 안명규 의원이 대표 발의한 ‘파주시 관광협의회 설립 및 지원에 관한 조례안’이 해당 상임위인 자치행정위원회(위원장 최유각)에 상정됐으나 위원들이 조례 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한 안 의원에게 질문은커녕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자치행정위원회는 22일 자유한국당 안명규 부의장이 대표 발의한 문화교육국 소관 ‘파주시 관광협의회 설립 및 지원에 관한 조례안’ 등 6건과 ‘파주시 진로교육 지원 사무 민간위탁 동의안’ 등 2건을 포함 총 8건을 심사하면서 안 부의장이 발의한 조례에 대해서는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위원들이 부결이나 보류를 이미 결정했기 때문이다. 안명규 부의장은 “의원이 발의한 조례를 동료의원이 부결시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최종환 시장이 조례 통과를 반대하는 의견을 파주시의회에 보내 결국 의원 간 싸움을 부추겼다.”라며 반발했다. 안명규 부의장이 대표 발의한 ‘파주시 관광협의회 설립 및 지원에 관한 조례안’은 더불어민주당 손배찬 의장, 최유각, 이성철, 목진혁 의원, 자유한국당 최창호, 윤희정 의원 등 6명의 찬성을 받아 발의됐다. 자치행정위원회 소속 의원은 민주당 최유각, 박은주, 박대성 의원, 자유한국
그동안 아프리카돼지열병을 쫓아다녔다. 양돈농가의 허탈과 시름, 그리고 살처분 앞에 선 돼지의 울음을 카메라에 담았다. 비가 오길 기다렸다. 아니면 먹구름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축산농가의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11월 13일 드디어 비를 만났다. 하늘이 꺼멓다. 아프리카돼지열병, 그 시름을 사진으로 담아내기에 아주 적당한 날씨다. 평소 눈에 봐 두었던 적성면 어유지리로 내달렸다. 이곳에는 ‘축혼위령비’가 있다. ‘축혼위령비’에는 “2010년 12월 14일 구제역이 발생되어 2011년 3월 11일 종료 시까지 매몰된 파주와 연천지역 257,207두 가축의 그 혼령을 위로하고자 이 비를 건립하였습니다. 2011년 12월 14일 파주 연천지역 축산농가 일동”이라고 기록돼 있다. 어유지리 축혼위령비는 구제역이 발생한 지 꼭 1년 만에 세워졌다. 당시 위령비가 세워지게 된 것은 파주연천축협(조합장 이철호) 대의원회에서 이상영 대의원을 비롯한 조합원들이 회의 참석 수당을 “모두가 좋고 바람직한 일에 써 달라.”라며 축협에 800여만 원을 자진 반납하면서 시작됐다. 축협은 고민 끝에 축산업 발전을 위한 구제역 축혼위령비를 건립하기로 뜻을 모으고, 700
한국전쟁 정전협정을 약 6개월 앞둔 1953년 1월 31일 임진강 리비교 건설 공사에 투입된 미군 제84건설공병대 소속 카투사 김호덕 상병이 전사했다. 코드명 X-RAY 작전으로 불린 교량 건설은 7월 4일 준공과 함께 ‘리비교’라 이름 붙여졌다. 파주바른신문이 서울과 대전의 국립현충원을 뒤져 고 김호덕 상병을 찾았다. 서울현충원에 김호덕 이름으로 두 명이 안장돼 있었다. 한 명은 2007년 경기 부천에서 숨진 김호덕 병장이었고, 또 한 명은 1960년 5월 24일 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것으로 확인됐으나 사망 장소와 일자가 나타나 있지 않았다. 묘비에도 앞면에는 김호덕 병장이 기록돼 있으나 뒷면에는 ‘27341’이라는 묘비 번호만 새겨져 있고 사망 장소와 일자는 없었다. 다른 묘비에는 대부분 사망 주소와 날짜가 적혀 있었다. 게다가 군번 9900947은 국방부 확인 결과 3명이 동일 군번으로 부여돼 있어 신원 확인이 어려운 상태였다. 특히 개인정보보호법에 막혀 가족 관계 등 더 자세한 신원을 파악할 수 없어 리비교 건설 중 숨진 김호덕 상병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김호덕 병장이 같은 인물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치단체가 정부기관에 분명한 목적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