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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소식

“국가재건시대에 지어진 장파중학교 역사속으로…”

미군의 도움으로 지어졌다는 안내판이 학교 벽면에 콘크리트로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던 장파중학교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됐다. 박정희 5·16 군사쿠테타와 함께 추진된 국가재건시기에 맞춰 지역유지와 미군의 도움으로 설립된 장파중학교는 시대 부흥에 따라 재건중학교라고도 불렸다.



 시민사회단체의 파주역사 올레길 코스 중 하나인 장파중학교는 설립 당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청년들이 교사를 자원했다. 그중 문산제일고를 졸업한 손근 교사는 장파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다가 금촌재건중학교로 옮겼고, 이후 파주시 공무원으로 금촌2동장을 지낸 후 현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있다. 문산제일고를 졸업한 신규옥 전 파주시 문화교육국장도 금촌재건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처럼 지역의 청년들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배움에 목말라 있던 학생들을 가르쳤던 곳이 바로 파주의 재건학교였다, 그런 시대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장파중학교가 건물 붕괴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파주시는 최근 장파중학교 인근에 있는 미군클럽 ‘라스트찬스’를 경기도 등록문화재로 신청했다. 라스트찬스는 장파중학교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다.


 아래는 2018년 4월 5일 파주바른신문에 소개된 파주의 재건중학교 보도 내용이다.


 1960년대 파주에는 5곳의 재건중학교가 있었다. 제일 먼저 생긴 학교는 법원읍(천현면) 대능리 미군부대 터에 있던 ‘덕성재건중학교’와 파평면 장파리의 ‘장파재건중학교’이다. 이어서 금촌동(아동면)에 ‘금촌재건중학교’와 파주읍(주내면)에 ‘애향재건중학교’, 교하동(교하면) 동패리에 ‘교하재건중학교’가 설립됐다.


 언론협동조합 파주바른신문 ‘바른체크팀’은 그동안 5개 학교 설립을 탐사취재했으며, 이를 5차례에 걸쳐 보도할 계획이다. 그 첫 번째로 시민단체의 기지촌 올레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파평면 장파리 ‘장파재건중학교’를 소개한다.


 “재건중학교요? 글쎄요, 미군이 지어 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내가 장파리 그 학교에 학용품을 갖고 자주 들렀던 기억은 있습니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재건학교가 생기고 나서 미군이 교실 짓는 걸 좀 도와준 것 같은데요.”


 파주군의원과 경기도교육위원회 의장을 지낸 조용호(83) 전 의원의 말이다. 주내면 연풍리 토박이인 조 전 의원은 60~70년대 파평면의 장파재건중학교에 당시 용주골 평화의원 한영수 원장과 학용품을 지원했다고 한다.


 “한영수(95년 작고 당시 73세) 원장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장파재건중학교에 애정이 참 많았어요. 평소 공책 등 학용품을 잔뜩 사놓고 있다가 나한테 함께 가자고 연락을 해요. 어쨌든 억척이었어요. 장파재건중학교를 잘 보존해서 그곳에 한영수 원장을 기념하는 나무라도 하나 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교사생활을 한 관계자의 말을 종합해보면, 장파재건중학교는는 1965년 천막 수업을 하면서 개교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파주에는 중학교 진학을 못 한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는 ‘고등공민학교’가 주내면(파주읍)과 천현면(법원읍), 광탄면에 있었다. 이후 재건중학교가 생기면서 폐교했다.


 ‘바른체크팀’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장파재건중학교의 경우 개교 당시 3학급에 90여 명의 학생이 모집됐다. 1974년에는 교원 6명에 학생 142명으로 늘어났다가 미군철수와 함께 학생 수가 점점 줄어들어 결국 폐교했다. 장파재건중학교의 전신이 현재 파평중학교라는 주장이 있지만 이를 확인할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대학 졸업을 하고 유학을 준비하던 중 지인의 사업 통역 부탁을 받고 1966년 여기(장파리)에 들어왔어요. 잠깐 도와주고 갈 요량이었지요.”


 장파재건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김민자 선생의 말이다.


 김 씨는 이화여대 사범대를 졸업한 후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인이 운영하는 양복점 통역을 부탁받아 장파리에 오게 됐고, 장파재건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내가 서울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장파리에서 적성의원을 운영하던 한영수 원장님이 장파리를 못 떠나게 하려고 중매를 한 거예요. 당시 한 원장님은 사실상 재건학교 교장을 맡고 있었거든요. 열정 하나로 봉사하는 교사들의 월급을 한 원장님이 챙겨주시곤 했지요. 정말 재건학교에 대한 애착이 대단하셨던 분이에요.”

김민자 씨는 결국 한영수 원장의 꼬임에 넘어가 유학을 포기하고 장파리 파출소 방범대장 일을 하며 재건학교 상업 선생을 하고 있던 남편과 결혼했다.


 1995년 세상을 떠난 한영수 원장은 장파리 ‘적성의원’과 용주골 ‘평화의원’에서 기지촌 미군 위안부 성병 진료를 담당했다. 한 원장은 자신이 운영하던 ‘평화의원’ 건물을 파주시에 경로당으로 무상 제공하기도 했다.


 장파재건중학교의 사실상 교장이었던 한영수 원장과 학용품을 지원했던 조용호 경기도교육위원회 의장, 그리고 꼬임에 넘어가 유학을 포기한 채 영어를 가르친 김민자 씨 등의 열정과 헌신을 볼 때, 장파재건중학교의 설립을 단순히 미군의 원조로 판단하고 기억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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