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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보건소 버스에서 뛰어내린 위안부 셋 그 자리서 숨져

미군 위안부들이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내려 3명이 숨졌다. 1980년 3월 27일 밤 9시 50분 파주군청 보건소 소속 마이크로버스(운전자 이용호 47)가 성병 검진증이 없거나 미성년자 등 단속에 걸린 9명을 태워 금촌의 ‘파주여자기술양성원’으로 호송하던 중 위안부들이 몰래 창문을 열고 뛰어내린 것이다.


 이 사고로 천현면 법원리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던 김 아무개(23) 씨와 전북 무안군에서 올라온 송일순(19) 씨, 경기도 의정부시의 박 아무개(20) 씨가 그 자리에서 숨지고, 주내면 연풍리 ‘캉캉살롱’에서 접대부로 일하던 최 아무개(22) 씨 등 5명이 중상을 입고 금촌도립병원(현 파주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1명은 도주했다.


 파주경찰서는 단속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 파주군청 부녀계장 경귀현(49) 씨와 부녀상담원 김선옥(28) 씨 등 직원 9명을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당시 파주군청이 단속에 걸린 위안부를 강제 입소시키려 했던 곳은 금촌에 있는 ‘파주여자기술양성원’이었다. 파주시보건소 아래에 있던 이 양성원은 현재 식자재 마트로 바뀌었다.


 ‘파주여자기술양성원’은 1963년 6월 31일 83만 원을 들여 ‘파주군립부녀직업보도소’라는 이름으로 개설됐다. 수용 인원은 50명에 직원은 6명으로 이발과 운전교육을 시켰다. 이곳에 수용되는 여성들은 대부분 신분증이 없거나 신분증이 있어도 검진증을 발부받지 못한 여성들과 미성년자 등이었다.


 기지촌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위안부가 되려면 복잡한 수속을 거쳐야 했다.
첫째로 신분을 보장하는 신분증(주민등록증)을 관할 경찰서에 제출해 신분보장을 받은 후 보건소가 발행하는 검진증을 발부받아야 했다. 검진은 보건소에서 지정한 대용진료소(병의원)나 보건소가 직접 운영하는 진료소에서 일 주일에 두 차례 받아야 했다.


 둘째, 위안부가 갖춰야 하는 것 중 또 하나가 ‘부녀회원증’이었다. 이는 일상생활에서는 그렇게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지역 기지촌으로 전출할 때 반드시 회원증이 있어야 인정받을 수 있어 꼭 필요했다. 회원증은 기지촌마다 조직돼 있는 위안부 자치회가 발급했는데, 1960년대 파주군에는 38개 자치회가 있었다. 그리고 증명서 중에 가장 위력을 발휘한 것은 업주가 발급한 ‘클럽카드’였다.


 미군 위안부가 되려면 이렇게 촘촘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런 까닭에 위안부는 자신들을 BG(Business Girl)라 일컬었고, 미군도 이들을 BG라고 불렀다는 당시 한국 주요 언론의 보도도 있다.



 이런 절차와 과정을 통과하지 못한 위안부는 행정당국의 단속에 걸려 ‘파주여자기술양성원’에 강제 입소 당해 면도와 머리 드라이 기술 등 이발 교육을 받았다. 면도 교육은 어려운 과정으로 꼽혔다. 자칫 잘못하면 손님의 얼굴에 상처를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양성원은 문제가 발생해도 어느 정도 이해해줄 수 있는 공무원을 실습 대상으로 삼아 파주군청의 협조를 받았다.


 현재 파주시청 본관 뒤 주차장 자리에 화장실과 이발소가 있었다. 원생들은 이곳에서 군청 직원들을 대상으로 얼굴 면도 실습을 했는데, 실습이 끝나면 얼굴 피부가 벗겨져 벌겋게 되거나 칼에 베여 핏방울이 송송 솟아나기 일쑤여서 각 부서는 실습 날이면 서로 가지 않으려고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신참 공무원을 이발소로 보내는 웃지 못할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1년여 거쳐 수료를 하는데, 수료식 때는 각 미군부대 간부들이 축하 내빈으로 참석해 병 주고 약 주는 기지촌의 명암이 연출되기도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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