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어... 이 기자 나야, 나 대머리... 대머리 형이야.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여러 번 전화했었는데, 지금 통화 괜찮아?” 내가 대머리 형으로 부르는 정형진 선배의 전화였다.
정형진(82)은 파주시청에서 30여 년 공직생활을 했다. 나는 그를 대머리 형 혹은 사진 선배라고 불렀다. 대머리 형은 문화공보실(홍보담당관)에서 사진과 영상을 담당하며 미군 기지촌 여성들의 교육과 단속 업무 등을 지원했다.
정 선배는 요즘 잘 죽기 위해 산다고 했다. 기억력도 점점 떨어지고 있다며 그래도 정신이 남아있을 때 그리운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문득 내가 생각났다고도 했다.
파주시청 재직 시 기지촌 여성을 단속했던 정 선배의 증언이 미군 위안부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 재판에 큰 도움이 됐다. 정 선배는 자신이 근무할 당시 미군 위안부를 클럽에 모아놓고 ‘미군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앉지 말라.’ ‘언행을 공손하게 해 미군의 화를 돋우지 말라’라는 친절교육과 ‘국가를 대신하는 외교관의 자세로 미군을 상대하라.’라는 애국교육을 시켰다고 증언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2민사부는 2017년 1월 국가배상 책임을 판결했다. 2018년 2월 8일 항소심 재판부도 미군 위안부의 손을 들어줬다.
정형진 선배의 증언은 지난 4월 15일 국회의원회관 제9간담회의실에서 열린 ‘기지촌 미군 위안부 진상규명 및 피해자 지원을 위한 입법 토론회’에서도 핵심적 입법 지원자료로 인용됐다.
정 선배는 술잔을 비우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파주읍 용주골 흑인 출입지역에 있는 ‘조마마상 클럽’으로 단속을 나갔는데 한눈에 봐도 어린 여자아이가 미군 무릎 위에 앉아 있는 거야. 그래서 그 아이를 불러 몇 살이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안 하는 거야. 할 수 없이 부녀계 여직원에게 방에 데리고 들어가 신체 발달 검사를 해보라고 했지. 생각했던 대로 성년의 몸이 아니었어.”
정 선배는 그 아이의 나이가 열다섯 살이었다고 했다. 미군과 포주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정 선배는 그 아이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공직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고 한다.
정형진 선배는 금촌 풀무골에서 1937년 태어나 지금도 그 자리에 살고 있는 파주 토박이다. 정 선배는 문산농고(문산제일고)를 졸업한 후 1959년 해병대에 입대했다. 군대에서 정훈참모부에 배치돼 사진과 영상 교육을 이수했다. 그리고 1962년 제대와 함께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서 서무를 보다가 1967년 파주군청 문화공보실 업무를 시작해 1996년 퇴직했다.